ADVERTISEMENT

美,베트남전쟁 본질몰라 패배 좌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예비역 육군대장 김진선(金鎭渲.육사19기)씨는 지난해 9월 24년만에 베트남戰 현장을 찾았다.70년 30대초반 그는 월맹군의 현상금 붙은 사나이였다.미국영화 『플래툰』의 용맹은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베트콩.월맹군을 너무나 잘 잡았기 때문이다.맹호(수도사단)부대 재구대대의 중대장(대위)때다.그가 1년동안 전투에서 가져온 월맹군 시체(屍體)만 72구로 기록적이었다.그는 하노이를 생각하면 불의에 가득찬 집단으로 생각하고 총을 겨누었다.그러나 예편뒤 베트남 방 문을 통해 그는 주위의 부러움을 샀던 자신의 베트남전 신화와 시각을 버렸다.그는 호치민(胡志明)기념관과 구치터널을 가보고 베트남전을 새롭게 보았다.거기서 베트남전의 본질은 이념이 아니고 민족주의였음을 확인했다.그리고 충격적인 고백록 을 썼다.고백록은 짧지만 맥나마라의회고록과 달리 현장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실감을 더해주고있다.다음은 요약내용.
75년 4월 월남이 공산화됐을때 너무도 섭섭했다.그 5년전 베트남戰시절 내 별명은 「불사조의 화신」「맹호 이빨중대」의 현상금이 걸린 사나이였다.
월남군 중대장이 『베트콩을 보면 우리는 피한다.무엇 때문에 남의 나라에서 목숨 걸고 싸우느냐』고 했을때 나는 『군인이기에임무대로 싸우는 것』이라고 대답했다.월남인이 늘 데모하고 분신자살하더니 결국 보트피플 신세가 된데 기가 막혔 다.
그러나 지난해 9월 북방권교류협의회 주최로 열린 한월학술발표회에 참석하기 위해 베트남을 방문하면서 나는 달라졌다.
하노이공항 청사의 조그만 공장처럼 왜소한 모습,막 개통했다는14㎞ 고속도로를 보고 도대체 이런 나라가 어떻게 1천5백억달러를 투입한 미국,한국군,그리고 2백만 월남군과 전투해서 이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이런 의문은 하노이의 전 쟁기념관.호치민(胡志明)기념관,그리고 구치터널을 보면서 하나둘씩 풀렸다.
전쟁기념관에는 디엔비엔푸전투가 영화.사판등 여러 형태로 담겨있었다.54년 베트민군은 호치민과 보 구엔 지압 장군의 지휘아래 독립약속을 위배한 프랑스와 결전을 벌였다.
베트민군은 대포를 끌고 산 꼭대기에 올라가 땅굴을 팠고 폭격을 피하기 위해 프랑스군과 수류탄 투척거리로 들어가 싸웠다.
이런 장면들을 보고 불가능한 전투를 필승으로 이끈 원동력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하고 골똘히 생각했다.그 승리는 군사적인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다.그렇다면 무엇이 있었을까-.
호치민市(옛 사이공) 근처의 무려 2백50㎞인 구치터널.지금은 관광명소인 이 터널에 들어가면서 그 해답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이공을 방어하던 美5사단 사령부와 거의 같은 위치에 베트콩의 지휘소가 있게 뚫었다.3층터널 내부에는 식당.병원,미군의 체격으로는 통과하지 못할 병목등이 구비돼 있었다.미군은 B-52 융단폭격을 감행하고 동굴에 물을 넣는 공격을 했으나 그들은 생존했던 것이다.
호미와 삼태기로만 판 땅굴,전깃불도 없는 어두운 동굴속 생활,서울에서 대전까지 갈 만한 긴 거리… 나는 신음소리를 내고 탄복했다.
디엔비엔푸나 구치터널은 인간의 의지만으로 부족하다.전략적인 개념만으로는 접근이 안된다.
이것은 삶의 의지 위에 강대국에 대한 증오,독립에 대한 열망,민족적 자존심,호치민에 대한 존경심,피해에 대한 복수심이 복합적으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이룩한 것이다.두개의 현장은 베트남전이 전쟁이라기보다 생사를 건 자존심의 대결임을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50년대 후반 프랑스로부터 인계인수를 한 미국은 민족적인 수난으로부터 자유.안정.소유를 얻으려는 베트남인의 열망을보지 못했다.미국은 단순히 공산주의 대 反공산주의적 성격으로만단정하고 군사력으로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교만에 빠졌다.
이때부터 미국은 패배를 자초했다.
호치민기념관은 그가 왜 존경을 받는지를 보여주었다.호치민은 74세때 유서를 썼는데 죽지 않자 매년 유언을 고쳤다.『내가 죽은 뒤 나를 영웅으로 만들지 말고 동상도 세우지 말라』는 맨마지막 유언이 새 색깔로 씌어 있었다.호치민은 민족주의의 화신이고 민족통합.해방.독립을 위한 결의의 상징이었다.
미국이 내세운 고 딘 디엠 정부는 족벌정치,극심한 부정부패,베트남인의 80%인 불교도에 대한 탄압,농민에게 분배된 토지의몰수로 독립 열망에 대한 또 하나의 배신을 했다.
75년 다낭전투에서 월남군 10만명이 고작 월맹군 2개대대 7백명에게 단 하루만에 와해됐다.이는 괴뢰정부의 자멸이었다.
사이공의 군대는 그들이 왜 싸워야하는지 그 이유를 몰랐기 때문에 초소를 이탈했던 것이다.
***「진리」 흐르는 곳 학술발표회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베트남전에 참가했을 때 하노이는 어둡고,악의에 찬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생각했다.그러나 이곳에 와서 진정으로 새로운생각을 갖게 됐다.이제 어느 나라도 베트남을 넘볼 수 없게 됐다.』 나는 참전용사로서의 자존심을 버렸다.베트남에는 하나의 민족이 살아가면서 겪었던 애환,강대국의 죄악,그리고 그것을 이겨냈다는 「진리」가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베트남을 떠날 때 파티석상에서 전쟁얘기가 나오자 옆자리의 한학자가 자신이 「혁명전사」(베트콩)였다며 『숨어 있던 정글속에서 외로울때 불렀던 노래를 하겠다』고 했다.다른 베트남인들도 합창했다.
그 노래를 듣고 나의 심정을 나는 이렇게 얘기했다.『베트남전선의 정글속에서 이 노래가 들려올 때마다 나는 전투를 중지하고잠을 잤노라』고.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