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 치닫는 이명박 - 손학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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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 출범이 파행으로 치닫고 있다. 이명박 당선인은 18일 “더 이상 미룰 경우 엄청난 국정의 혼란과 공백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조각 명단을 전격 발표하는 초강수를 뒀다. 통합민주당은 “협상 결과에 관계없이 조각 명단을 발표한 것은 오만의 극치”(최재성 원내대변인)라며 비판을 쏟아냈다.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둘러싼 승자 없는 싸움은 이 당선인과 손학규 통합민주당 대표의 양보 없는 명분 싸움 때문이란 지적이 나오고 있다. 오락가락한 협상 과정은 이 당선인과 손 대표의 불신의 벽을 높이 쌓았고 감정적 골만 더 깊게 했다는 분석이다. 이런 명분 싸움 속에 두 사람이 ‘불완전한 새 정부’와 ‘총선 역풍’이라는 부메랑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더 늦추면 국정혼란 온다”

초강수 선택 이명박
“공무원들 일손 놓고 있지 않나”

 이명박 당선인은 18일 자신의 소신에 맞는, 그러나 정치적으론 가장 가파른 길을 선택했다. 국무위원을 딱 15명만 발표한 것이다.

지난달 16일 그가 현행 18부4처를 13부2처로 줄이는 정부조직 개편안을 발표했을 때 정치권 안팎에선 즉각 통폐합 대상 부처의 대부분을 살려내란 요구가 나왔다. 그만큼 국회를 통과하는 건 불투명했다.

그는 당시부터 협상이 결렬됐을 때에 대비해 몇 가지의 시나리오를 준비했다. 이 중 가장 강한 방안이 정부조직 개편안이 처리될 것이라고 가정하고 15명만을 임명하는 것이었다. 이 당선인이 이날 선택한 길이다.

이 당선인은 그래서인지 이날 오후 8시 장관 후보자들을 소개하며 “어쩔 수 없는 결정이다” “더 이상 좌고우면할 수 없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러면서 “반드시 경제를 살리겠다고 약속했고 그 첫걸음이 바로 작은 정부, 알뜰하고 유능한 정부를 만드는 것”이라며 “(그러나 국회 협상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타결될 듯하면서도 타결되지 않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 당선인은 이날 몇 가지 우려할 만한 현상을 나열했다. “이해관계자들이 반발하고 있고, 공무원들이 일손을 놓고 걱정스러운 상황에 서게 됐다”거나 “일부 총선을 의식해 작은 정부의 참뜻을 왜곡하는 일들도 발생했다”는 등의 발언이다. 그는 새 정부 출범까지 불과 1주일도 안 남은 상황이란 점에 대해 고심했다고 한다. 이대로 가면 국무회의조차 제때 구성하지 못할 상황이기 때문이다.

인수위 주변에서도 “이젠 더 이상 기다리기 어렵다”는 말이 나왔다. 한 인수위 관계자는 “정부조직법 개편안 처리를 총선 이후로 늦추란 얘기도 있는데 권력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얘기”라며 “지금도 부처를 살려내란 압력이 심한데 그때 되면 누더기가 돼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 당선인은 강수를 두면서도 통합민주당과의 협상을 의식해 여지를 남겼다. 불법 논란을 피하기 위해 13개 부처의 경우 현행 부처의 이름을 썼다. 예를 들어 강만수 장관 후보자를 정부조직 개편안에 따른 ‘기획재정부’가 아닌, 현행 법에 따른 ‘재정경제부’로 지정하는 방식이다.

한나라당과 통합민주당 간의 기존 합의도 존중했다. 남주홍 국무위원 후보자는 사실상 통일부 장관 임명 가능성이 크다. 이춘호 국무위원도 여성가족부(또는 양성평등위) 몫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통합민주당의 반발을 피하긴 어려울 듯하다.

이 당선인으로서 남은 최선은 새 정부 출범 전에라도 협상이 타결돼 정부조직 개편안이 확정되는 것이다. 장관 이름을 바꾸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차선책은 26일 한승수 총리 인준이 이뤄지는 것이다. 통합민주당의 반발로 국무총리마저 없는 상황이 되면 이명박 정부는 총리와 장관이 없는 ‘식물 정부’가 될 수도 있다. 이 당선인에게든 통합민주당에든 아주 부담스러운 상황이 될 수 있다.

고정애 기자



“이게 뭐 하는 사람들인가”

당혹스러운 손학규
조직법 논의 중 당사 나가 버려

오후 6시30분쯤 대통령직 협상 결과와 관계없이 조각 내용을 발표하겠다는 인수위의 계획을 전해 들은 통합민주당 손학규 대표의 첫 반응이었다고 한다. 대구지하철참사 추모식 행사에 참석했다 오후 5시쯤 서울 영등포 당사로 돌아온 손 대표는 박상천 대표와 함께 김효석 원내대표로부터 낮에 있었던 한나라당과의 협상 결과를 논의하던 중이었다. 소식을 들은 직후 손 대표는 개인 약속을 잡고 당사를 나가버렸다고 측근들이 전했다. 잠시 국회로 돌아왔던 김효석 원내대표도 “협상 진행 중에 조각 내용이 발표돼 당혹스럽다”며 청사를 떠났다.

이날 오전 국립 현충원을 참배했을 때 손 대표는 방명록에 “오직 국민의 뜻을 받들고 나라의 이익과 미래를 생각하는 강력한 야당이 되겠습니다”는 의지를 다지는 글을 남기기도 했었다.

손 대표의 한 측근은 “해양수산부를 유지해야 한다는 뜻에 변함이 없음에도 무기명 자유투표로 표결을 제안하자는 협상단의 마지막 카드를 어렵사리 수용했었다”며 “최소한의 정치적 신뢰가 지켜지지 않은 것에 대해 충격이 큰 것 같다”고 전했다.

김상희 최고위원은 “국민과 여당과 모두를 무시하는 독주”라고 비판 했다.

우상호 대변인은 “‘당혹스럽다’는 말에 손 대표와 김효석 원내대표의 심정이 압축돼 있다”며 “국회의 협상을 깨도록 유도하는 대통령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 최재성 원내 대변인은 “안상수 대표가 전권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명박 당선인의 호루라기 소리 하나면 모든 게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됐다”며 “우리 당이 이 당선인이 인정하는 안이라는 증표를 가지고 오라고 요구한 게 그 때문이었다”고 성토했다.

임장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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