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링어, 타임워너를 움직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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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하워드 스트링어 소니 회장

소니가 6년에 걸친 ‘차세대 DVD 규격 전쟁’에서 승리했다. 소니에 맞서 ‘HD DVD’방식을 추진해 온 도시바는 “더 이상 승산이 없다”며 사실상 사업 철수를 결정했다고 일본 언론들이 17일 일제히 보도했다. 도시바는 이번 주 중 사업 철수를 공식 발표한다. 소니로서는 197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친 ‘VHS 대 베타’의 ‘14년 비디오 전쟁’ 참패를 설욕한 셈이다. 소니의 승리 뒤엔 스트링어 회장의 ‘고공 로비’가 있었다.

◇대세 결정지은 워너브러더스의 ‘반란’=“오늘은 ‘블루(Blue) 일색의 날이다.” 지난달 7일 하워드 스트링어 소니 회장은 ‘블루레이 디스크(BD)’ 방식의 ‘승리 선언’을 했다. 사실상 전쟁이 끝났다는 선언이었다. 미국의 영화사 워너 브러더스의 ‘반란’ 사흘 후였다.

워너 브러더스는 그간 도시바를 지지했다. 그런데 돌연 “올 6월 이후 (영화 소프트웨어를) 블루레이에만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여기엔 스트링어 소니 회장의 ‘고공 플레이’가 작용했다는 게 소니 고위 관계자의 설명이다.

스트링어는 워너 브러더스를 아군으로 끌어올 수 있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다고 판단했다. 워너 브러더스는 DVD 콘텐트 시장 점유율이 20%인 최대 업체다. 그는 먼저 모회사인 타임워너를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타임워너의 주가가 지난 1년 동안 27%나 고꾸라진 데 주목했다. 지난해 말 최고경영자로 내정된 제프리 뷰케스 최고운용책임자(COO)를 집중 공략했다.

“타임워너의 주가가 왜 하락하는지는 당신이 더 잘 알지 않느냐. 차세대 DVD 규격에 대한 시장의 불안감 때문이다. 소비자들은 이대론 DVD 소프트웨어를 외면하고 인터넷으로 간다. 주가도 마찬가지다.”

타임워너는 당시 가장 큰 수익원인 DVD 판매 부진으로 위기감에 빠져 있었다. 스트링어 회장은 이런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재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스트링어 회장은 소니에 몸담기 전 미국의 CBS 방송국 프로듀서와 사장까지 지냈다. 미국 미디어 업계와 할리우드의 고위 관계자와 전화 한 통으로 담판 지을 수 있는 폭넓은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 타임워너로서도 스트링어의 적극적 ‘구애’는 울고 싶은데 빰 때려 준 셈이었다.

동맹군의 배반이라는 결정타를 맞은 도시바는 이후 미국과 유럽시장에서 ‘반값 세일’로 반격을 노렸으나 흐름을 뒤집지 못했다. 여기에 세계 최대의 유통업체인 월마트가 15일 BD 지지 선언을 하며 전국의 4000여 개 점포에서 HD DVD 제품을 완전 철수시키겠다는 발표를 하자 도시바는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6년 ‘규격 전쟁’ 종지부=차세대 DVD의 규격을 논의하는 ‘DVD 포럼’에서는 당초 HD DVD가 검토됐었다. 그러나 2002년 2월 소니가 돌연 이 포럼을 박차고 나가며 BD 규격을 들고 나오면서 규격 전쟁이 시작됐다. 두 진영은 한때 규격 일원화를 위한 협상을 벌이기도 했으나 결렬됨에 따라 2006년 각각 제품을 내놓았다. BD는 기억 용량이 크고, HD는 저가화가 가능하다는 특징이 있으나 상호 호환성이 없기 때문에 소비자의 혼란을 초래해 왔다.

전문가들은 “도시바의 패인은 특허 수입에 몰입한 나머지 다른 가전업체들을 끌어들이는 데 실패했고,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미국의 대형 영화사들을 잡아 두는 데도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한편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국내 전자업계는 블루레이가 사실상 차세대 DVD 표준으로 확정된 것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업계 관계자는 “블루레이와 HD DVD를 모두 볼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를 이미 개발해 차세대 규격이 어떤 쪽으로 결정돼도 큰 문제는 없다”며 “규격 통일로 플레이어 가격이 낮아지고 콘텐트 출시도 늘어나면 블루레이에 가장 적합한 풀HD 디스플레이 시장도 급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김창우 기자

◇블루레이=DVD보다 저장 용량이 큰 차세대 디지털 데이터 저장장치. DVD 디스크에 비해 짧은 파장(405nm)의 레이저를 사용해 데이터를 읽기 때문에 DVD와 크기가 같지만 더 많은 데이터를 담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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