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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기 소리 지켜라" 슈바이처 말이 내 삶 바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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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9월 국내의 한 TV방송에서 폴란드를 무대로 제작한 ‘명품 악기의 세계’란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었다. 포츠난에 있는 국립악기박물관에서 진행된 장면에서 등장한 악기는 1606년 제작된 현존 최고(最古)의 바이올린 ‘그로불리쯔(Groblicz)’. 폴란드 궁정악기제작자였던 그로블리쯔 1세(1540~1609)가 만든 작품으로, 박물관 측은 “국보”라며 “현(絃), 소리 등 모든 상태가 아주 좋다”는 평과 함께 즉석에서 이 명품으로 시연을 해 보인다. 엘가의 ‘사랑의 인사’, 헨델의 ‘바이올린 소나타 3번’,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슬픔’이 연주되자 방송진행자는 “포근하면서도 애절한 선율”이라며 “그로블리쯔 바이올린이 참았던 숨을 토해내듯 신비의 소리를 마음껏 뿜어냈다”고 극찬했다.

바로 이 시각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선 이 방송을 지켜보던 한 노신사가 “그러면 그렇지!”라는 탄성과 함께 무릎을 치며 연신 파안대소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진 화면에서 바이올린 제작전문가(파블리코프스키)가 “그로블리쯔의 방식대로 만들어도 재현이 불가하다”며 “아무래도 판을 깎는데 비법이 있는 것 같다”고 하자 이번엔 실소를 흘린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로그램의 주인공인 그로블리쯔를 2년 전 거의 ‘고물’수준에서 오늘의 명품으로 ‘재생’시킨 것이 바로 자신임에랴.

이 노신사의 이름은 앙드레아 방(한국명 方永昌ㆍ73). 스트라디바리(Stradivari)ㆍ과르넬리(Guarneri)ㆍ아마티(Amati)ㆍ갈리아노(Gaglino) 같은 서양고전 현악명기(絃樂名器)의 세계적 복원전문가로 명기를 다루거나 소유한 사람치고 그를 모르면 간첩(?)소리를 들을 정도다. 그래서 그의 호칭 앞에는 늘 ‘마에스트로(Maestroㆍ이탈리아어로 명장이란 존칭)’가 붙는다. 그가 들려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바이올린인 그로블리쯔 복원사연.

“2001년 12월 낡은 바이올린 한 대가 왔습니다. 얼핏 보아도 배가 불룩한 것이 요즘 표준형과는 판이하게 달라 오래된 것은 분명했지만 덩그마니 형태만 그럴싸할 뿐 악기에 입혀진 도료나 목질의 경도가 형편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연주가 불가능한 노쇠상태였죠.”

당장 내치고 싶었지만 그를 붙잡는 게 있었다. 악기와 함께 온 러시아의 권위 있는 전문가‘블라디미르 키토프(Vladimir Kitov)’의 ‘진품’ 감정서였다. 키토프는 1990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한 바이올린 연주자 겸 제작자로 고전악기에 대한 철저한 고증과 감정으로 정평이 나있는 인물. 더구나 러시아, 미국 등을 돌고 돌아도 ‘못 고쳐’ 마지막으로 자신을 찾아왔다는 게 아닌가. 그러니 어쩌겠는가, 이 명기에 온전한 생명을 다시 불어넣어줘야지. 그래서 이듬해 1월 말 폴란드를 찾았다. 나름대로 확인과 고증을 하느라 그로블리쯔의 고향이자 활동무대였던 옛 수도 크라코프를 비롯, 바르샤바, 포츠난 등 보름동안 전국을 돌며 박물관관계자, 고고학자, 악기전문가 등을 만났다.

“이 과정에서 포츠난의 국립악기박물관에 있는 그로블리쯔 2세의 작품을 통해 다시 한 번 의뢰품이 진짜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또 그로블리쯔가 현악기 제작의 전설인 이탈리아의 앙드레아 아마티와 동 시대인물로 똑같이 브레시아파 양식을 따랐으며, 악기의 밑판과 옆판을 폴란드 특산 단풍나무(jawor oczkowy)만을 사용하고 ‘f‘ 모양의 구멍 면을 날카롭게 했다는 점 등을 파악하고 나니 일단 감이 잡히데요.”

귀국 후 목질의 정확한 경도상태 등을 체크해 그에 걸맞은 도료를 복원하느라 몇 날 며칠 밤을 새웠는지 모른다. 가까스로 도료를 복원한 뒤에도 내부도포작업이 까다로워 애를 먹었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가. 석 달 만에 드디어 복원에 성공했고, 이로써 명성 하나를 더 쌓았다.

방 씨는 현재 논현동에 ‘크레모나 인 서울(Cremona in Seoul)’이란 이름의 음리(音理)과학연구소를 운영하며 연구와 작업을 하고 있다. 크레모나는 17~18세기 아마티ㆍ스트라디바리ㆍ과르넬리 등 전설의 현악기 제작 3대 가문이 활약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성지(聖地). 이곳에서는 지금도 프란치스코 비솔로티, 지오바타 모라시 등 세계적인 바이올린 제작의 거장을 비롯한 200여명의 장인들이 활동하고 있는데 방 씨는 이들 모두 방 씨를‘마에스트로’로 깍듯이 대접한다.

하지만 그의 이 같은 성공인생도 출발부터 마련돼 있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기구할 수가 없었다. 1935년 일본 나고야에서 와세다대 출신 한국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였던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방 씨는 네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익힐 정도로 음악적 재능을 타고 났다. 다섯 살이 되면서 도쿄 우에노로 옮겨 바이올린 공부를 계속하던 중 초등학교 3년 때 일본의 패전으로 아버지를 따라 귀국하면서 어머니와 생이별을 해야 했다. 서울에 본처가 있던 아버지는 그를 의사이던 친구에게 맡겼고, 경기중 2년 때 한국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양부모와도 헤어져야 했다. 하지만 그는 한 시도 바이올린을 놓아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 품으로 가기 위해 무작정 부산으로 갈 때도 달랑 바이올린뿐이었고, 도일(渡日)에 실패한 뒤 대구의 피란민 수용소에서 생활할 때도 그랬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든가. 그를 전쟁의 수렁에서 건져준 건 역시 바이올린이었다. 때마침 인근에 있던 공군정훈감실에서 실시한 군예술대원 공모에 최연소로 합격, 유엔군 위문공연활동을 하게 됐다. 주로 사천ㆍ수원ㆍ강릉 등 전투비행단을 돌며 위문연주를 하던 그에게 행운의 씨앗이 뿌려지기 시작한 것은 51년 가을 맥아더사령부 고문단이 참관한 가운데 미8군 장교구락부에서 공연을 가진 것이 계기. 고문단의 실력자가 ‘바이올리니스트 쇼리’의 실력에 감탄해 당시 공군정훈감이었던 김기완 대령을 통해 그를 일본의 맥아더사령부로 초청했던 것이다. 도쿄사령부에서 두 차례 공연을 했는데 당시 군목(軍牧)이 “재능이 아깝다”며 파리 행을 주선, 이듬해 초 열일곱의 나이로 프랑스 유학길에 오르게 됐다. 외방선교회 소속으로 신학을 공부하며 틈틈이 종교단체에서 연주를 하던 그에게 두 달 만에 또 다른 길이 열리고 있었다.

그를 눈여겨보던 줄리앙르란 여성신자가 신학보다는 바이올리니스트의 길을 갈 것을 권하며 후원자로 나섰던 것이다. 당시 45세이던 그녀는 리옹 인근에 수천 평의 포도원과 대여섯 개의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던 부자이자 사교계 명사로 그에게 숙식제공은 물론 유명한 선생들한테 개인레슨까지 주선해주었다. 그가 사사한 스승만 파리에서 활동하던 물리껭, 뽕퓨를 비롯, 프랑크프르트의 니콜로 야노프스키, 밀라노의 시베리오와 프란시스코 베르니, 암스텔담의 헤리거 등 10여명이나 되었다. 이 중 특히 독일계인 물리껭은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명기 스트라바디(1702년산)를 물려줄 정도로 그의 재능을 사랑했다. 이 과정을 통해 그의 기량은 일취월장했고, 이를 지켜보던 마담 줄리앙르는 “명연주자가 되려면 명기를 다뤄봐야 한다”며 “명기라도 작품마다 소리가 다르니 다양하게 느끼고 경험하라”는 격려와 함께 각종 명기 바이올린을 마련해 주었다. 스트라디바리(1702년) 1대, 과르네리(1705년,1711년) 2대, 아마티(1659년) 1대, 루게리(1732년) 1대 등 값으로 따져도 어마어마(※2005년 뉴욕 경매에서 스트라디바리 한 대가 203만2000달러에 낙찰됐다)하지만 연주자라면 누구나 군침을 흘릴 그런 것들이었다.

이렇게 자신이 받은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기 위해 그는 유럽 각국을 휘젓고 다니며 수업을 강행하는 중에도 틈틈이 개인 리사이틀은 물론 55년 ‘비발디현악4중주단’을 구성, 종교·사교 단체를 대상으로 장애인 등 불우이웃돕기 자선공연을 펼쳤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사이 어느덧 10년이 흘러 26세가 되던 61년 그에게는 또 한 번 인생의 변곡점이 찾아왔다.

“초겨울이었습니다. 리옹에서 스트라디바리로 자선공연을 하는데 그 유명한 슈바이쳐 박사가 참석했어요. 공연이 끝난 뒤 그 양반이 ‘솜씨는 훌륭한데 소리가 노쇠해 글렀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아무리 훌륭한 연주라도 죽으면 끝나지만 명기의 소리를 보전하는 일은 인류를 위해 영원한 문화유산을 남기는 일이라며 해보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명기를 많이 다뤄본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라며…”

귀가 솔깃했다. 하지만 고민스러웠다. 인체를 알려면 해부를 해봐야 하듯이 박사의 권유대로라면 그 소중한 악기들을 부숴야 할 텐데…. 어찌할 꺼나, 어찌할 꺼나. 두 달을 끙끙거리다 결국 조심스럽게 ‘마담’에게 털어놓았다. 뜻밖에도 ‘마담’은 선선했다. “이왕 맘먹었으면 다부지게 끝을 보라”고 했다. 하지만 그래도 선뜻 용기가 나질 않았다. 이미 자신의 일부가 돼버린 저들이 아닌가.

하는 수없이 며칠을 더 고통 속에 보낸 뒤 눈을 질끈 감고 스트라디바리 한 대를 밟았다. 이어 과르네리와 아마티, 루게리가 눈물 속에 가루로 변했다.(※이 와중에서도 다행히 30억원이 넘는 1705년 산 과르네리 한 대와 독일서 국보로 치는 1647년 산 스타이너 한 대는 살아 남았다.) 도료에 비밀이 있을 것이라는 슈바이처 박사의 충고에 따라 도료가루를 모아 노르웨이의 고고학자 노먼교수에게 자문을 구했다. 노먼은 도료가 천연물질이라며 르네상스시대 각종 천연도료의 유통루트를 가르쳐 주었다. 즉시 탐색에 나섰다. 기니, 세네갈 등 아프리카 동부와 인도, 태국 등을 샅샅이 뒤져 16~17세기에 이들 지역에서 유럽으로 수출한 도료의 원료 30여 가지를 찾아냈다. 이어 용도실험을 거쳐 이 중 10여 가지만 악기에 사용됐다는 점을 밝혀냈다. 곤충의 배설물, 열대식물의 수액, 로열젤리, 잣나무 열매, 커피열매 등이 그 것이었다.

문제는 배합비율. 방 씨는 악기를 부숴 얻은 가루와 비교하며 끊임없는 실험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천연도료는 휘발유가 아닌 위스키 원액을 사용해 녹여야 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수없이 좌절을 겪었지만 그 때마다 ‘마담’의 격려로 버틸 수 있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300여대의 바이올린을 만들었다 부수기를 10년 만에 마침내 비법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는 12가지의 원료를 사용해 목형(木型)의 상태에 맞추는 26가지의 배합을 완성한 것이다.

“악기의 소리가 완성되는 데는 목형이 30%, 도료가 70%를 차지합니다. 목형을 만드는 것은 오히려 스트라디바리 때보다 우수하지만 소리가 형편없는 것은 바로 도료 때문입니다.”

비법을 찾아낸 뒤 그는 이탈리아 피렌체에 연구소를 차려놓고 4년간 본격적으로 재현 연구에 돌입했다. 이를 통해 그는 소리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도료외에도 브릿지ㆍ사운드 포스트ㆍ로진(활에 묻히는 일종의 송진)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자신만의 ‘제품’을 개발했다.

방 씨는 70년대 중반부터 자신만의 노하우를 가지고 낡은 고전명기의 복원은 물론 이탈리아ㆍ독일ㆍ오스트리아ㆍ프랑스ㆍ폴란드ㆍ체코 등의 악기 명장들과 손잡고 명품들을 재현해내고 있는데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아무리 명장이 만든 목형이라도 그의 기준에 맞지않으면 툇짜를 놓기 일쑤고, 일단 칠작업까지 해 만들었다가도 제 소리가 안 나면 그대로 부숴버린다. 바이올린(첼로나 비올라도 마찬가지다)의 상판은 스프르스(가문비나무의 일종), 옆판과 밑판은 단풍나무로, 휜거보드(손잡이)는 흑단으로 이뤄지는데 방 씨는 명장들이 만든 목형을 엄격한 방법으로 검사해 통과된 것만 작품의 ‘원자재’로 사용한다. 나무가 어떤 상태에서 자란 것인지, 또 자연상태에서 30년 이상 건조된 것인지, 두께나 규격은 올바른 지 등 10여 가지를 체크해 하나라도 맞지않으면 즉각 제쳐버린다. 일단 기준에 통과하면 자신만의 비법인 도료를 입히는 작업에 들어가는데 이 또한 만만치 않다.

우선 나무의 경도 등에 맞춰 3종의 천연도료를 배합해 나무에 침투시킨 뒤 적당히 건조시켜 2단계 도포를 한 다음 사포로 갈아낸다. 모두 4단계를 거치는데 단계마다 배합도료의 종류와 비율이 다르고 완성되기까지 보통 3~4주 걸린다.

“제가 만든 작품들은 표면이 매끄럽지 않고 곰보스타일입니다. 물질의 반사작용에 의한 것인데 옛날 명기들이 다 그렇죠. 요즘 화학도료를 쓰면 매끈한 게 보기는 좋은데 소리는 영 아니죠. 제 작품이 평가받는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그의 작품들은 베를린ㆍ비엔나ㆍ뉴욕 필하모니 연주자들에 의해 이미 우수성을 인정받았고 특히 ‘제2의 파가니니’란 칭송을 받는 이탈리아의 바이올리니스트 살바토레 아카르도한테 “최고의 바이올린”이란 극찬을 받았을 정도다.

그의 이 같은 성취는 타고난 음악적 재능에다 실제로 다양한 고전 명기를 다뤄본 ‘경험적 음감(音感)’이 없었으면 절대로 불가하다고 자평한다.

“명기란 대곡(大曲)을 연주할 때 100여 악기를 상대할 수 있는 명료한 소리를 내야합니다. 과르네리는 선률이 장중해 남성적이라면 스트라디바리는 여성적이고, 아마티는 그 중간 정도인데 모두 소리전달만큼은 기막힙니다. 현재 스트라디바리는 300대, 과르네리는 100대쯤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워낙 노쇠한 탓에 이미 절반이상이 은퇴한 상태입니다. ”

그가 지금까지 재현해낸 ‘명품’은 400여대. 대당 10만 달러를 호가하지만 죄다 가톨릭 자선단체에 불우아동 돕기 기금용으로 맡겼을 뿐 한 대도 사리(私利)를 목적으로 팔아본 적이 없다. 자신의 혼이 담긴 예술품을 돈과 바꿀 수 없다는 신념에서였다. 그는 국제바이올린 콩쿠르 우승자에게 자신이 재현한 작품을 상품으로 주는 ‘앙드레아 방 프라이즈’를 운영하고 있는데 84년 런던,97년 뉴욕에 이어 내년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한편 그가 교황 요한 바오로 즉위에 맞춰 1년 간 공들여 만든 ‘부활’이란 이름의 바이올린은 바티칸에 소장돼 있기도 하다. 92년 러시아 국영 TV에서 그에 대한 다큐를 방영한 것을 비롯,100여국가에 소개됐다. 3월 중 일본 NHK와 프랑스 르몽드의 취재요청도 받아 놓은 상태이다.

요즘도 연구를 하느라 하루 세 시간밖에 자지 않는다는 방 씨는 명기재현뿐만 아니라 감정(鑑定)과 국제시세, 구입요령 등에 대한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방 씨는 한 때 자신을 버린(?) 조국을 원망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조국이 있었기에 자신에게 명성을 얻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생각이 든 뒤론 조국을 사랑하게 됐다. 한창 바삐 돌아치던 70년대 중반 간간히 고국을 찾아 자선연주회를 가진 것도, 그를 통해 78년 지금의 부인과 결혼해 서울에 정착한 것도 모두 그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자신만의 비법을 조국의 후배에게 고스란히 물려줄 생각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후학들을 위해 자신이 보유한 진품 등을 전시할 ‘명기문화과학박물관’을 여는 일이다.(※박물관 건은 5공 때부터 정부에 청원했으나 흐지부지한 상태로 89년 사재 30억원을 털어 서울 압구정동에 240평 규모로 열었다가 IMF로 인해 8개월 만에 문을 닫았다.)

글=이만훈 전문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앙드레아 방은1935년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나 한국전쟁을 거‘고아’가 됐다. 네 살 때부터 익힌 바이올린 덕분에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로 가 연주자로 활약하다 스물여섯에 고전 명기 연구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10년 만에 비법을 터득해 80년대 초부터 ‘마에스트로(名匠)’ 반열에 오른다. 타고난 음감과 명기를 오래 다뤄본 경험을 토대로 스트라바리 등 고전명기의 ‘진음(眞音)’을 재현해 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92년 러시아 국영 TV에서 그에 대한 다큐를 방영한 것을 비롯, 100여 개국에 소개됐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의 즉위에 맞춰 1년 걸려 만든 ‘부활’이란 이름의 작품이 교황청에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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