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길례는 눈을 크게 뜨고 아들을 봤다.
『증조할아버지 얘기 아시지요?』 『독립운동으로 일본서 옥살이하다 돌아가신 분 말이지?』 일본 명문대학의 영문과를 다닌 그분은 명석하고 언변 좋고 다부지기로 소문났었다 한다.당시 도쿄유학생 사이에서도 늘 리더로 손꼽혔고,태극기를 만들어 돌리기에열성이었다고 들었다.인물도 썩 잘 생겼는데 원통하게 옥사했다.
그분 아들은 남편에겐 큰아버지가 된다.아버지 못지않은 인물이었다.총명과 다부짐은 김해 허씨 문중의 오랜 내력이기도 했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독학해 자수성가(自手成家)했다.남편과는 사촌간인 그 아들은 타고난 예술가였다.할아버지가 사시던 곳,옥살이하던 곳을 두루 사진찍겠다며 일본에 간 후 소식이 깜깜했다.언젠가는 사할린으로 촬영간다든가 하는 소문을 들었을 뿐이다.
그 사촌이 지난번 나고야(名古屋)지진 때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 곳 교포 여성에게 늦장가 가 젖먹이 아들 하나를 뒀는데 내외는 숨지고 아기만 혼자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한다.
『아버지는 그 아이를 우리집에 데려다가 키우시려나 봐요.어머니께서 힘드시겠지만 저는 찬성했어요.…아버지는 큰할아버지 덕에공부하셨다나 봐요.』 기가 막혔다.
그런 엄청난 일을 왜 진작 귀띔해 주지 않았을까.
『어머니나 누나한텐 누나 결혼식 후에 얘기할 테니 그 전엔 말하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남자끼리만 알고 지냈구나.』 『아버지로서는 여러가지로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겠지요.』 가슴안성곽이 소리없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남편과의 그간 일이 어지럽게 머리를 스쳤다.지극히 가까운 것같으면서도 이처럼 먼 「부부관계」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아기는 지금 어디 있대?』 『나라(奈良)에 사는 아기외할머니가 키우고 계시는데,누나가 결혼식을 올리는대로 아버지께서 가 데려올 모양이에요.』 한숨이 절로 나왔다.한 약소국가가최근세에 겪은 비운(非運)의 그늘은 해방된지 반세기가 넘도록 아직까지 걷히지 않았다는 것인가.
일어서서 전시장 안으로 들어갔다.신라토기 코너 한 구석엔 관광객이 무더기져 모여 있었다.
토우장식장경호(土偶裝飾長頸壺).높이 한 자 가웃,항아리 어깨엔 색다른 토우 여러개가 붙어 있다.거문고 타는 임신한 여자랑애정행위를 하려는 남녀의 익살스런 흙인형들이다.설명에 의하면 5~6세기께의 신라토기로 씨앗을 담았거나 풍년 기원제에 쓰인 항아리라 한다.
「씨」를 잇는 일은 고대에 있어서는 제사에 버금가는 신성한 축의(祝儀)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