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80. 정년 퇴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필자가 좋아한 이화여대 교정의 북아현동 쪽 길. 어느 날 이 길을 걷다가 아름다움에 반해 잠깐 멈춰서 찍은 사진이다.

 내 생일은 5월 31일이다. 내가 27년 동안 몸담았던 이화여대는 이날 큰 축제를 열면서 수업도 안 한다. 매년 내 생일파티를 열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바로 이 날이 이화여대 개교기념일이기 때문이다.

이화여대와 나의 인연이 희한하다. 1974년 이화여대로 들어오면서 우리 집도 이사했다. 나는 어린 시절 부산에 피란 갔을 때를 빼고는 줄곧 서울 사대문 안에서 살았다. 그런데 이때 처음으로 사대문 밖인 북아현동으로 나오게 됐다. 얼마 있다가 이화여대는 북아현동 쪽에 새로 대문을 냈다. 마치 나를 위해 낸 문 같았다. 우리 집에서 이 문을 통해 음악대학까지 가는데 정확히 4분이 걸리며 더구나 그 길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2001년 이화여대에서 65세로 정년 퇴직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학교 안에 있는 은행·우체국·매점을 이용한다. 몸에 익어 편하고 캠퍼스 풍경도 정겹기 때문이다. 좀 과장하자면 교내 은행에서는 퇴직 교수들을 모두 만날 수 있다. 이들은 “퇴직 후에 우리를 더욱 반겨주는 유일한 사람이 은행 지점장”이라고 입을 모아 우스갯소리를 한다. 그만큼 이화여대와 뗄 수 없는 정이 들었다. 국악과 교수들이 다 모여 점심을 먹을 때 나는 아직도 종종 참석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점심을 함께하는 이 전통은 내가 과장을 할 때 만든 것이다. 원래 이화여대에는 명예교수가 되면 수업을 전혀 맡지 않는 전통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정년 퇴직 후 2년 만인 2003년에 다시 강의를 맡은 최초의 명예교수가 됐다. 강의 정년은 70세여서 지금은 그만뒀다. ‘자랑스러운 이화인상’을 받은 첫 번째 남성이라는 기록도 내가 가지고 있다.

이처럼 단순한 직장 이상의 의미를 가진 이화여대를 떠나게 되자 느낌이 남달랐다. 퇴직 3년 전쯤에는 섭섭했다. 신입생들을 보면 ‘저 아이들이 졸업할 때쯤 나도 학교를 나가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퇴임식 당일이었다. 다른 퇴직 교수들과 함께 식을 마치고 나니 ‘너무 오래 했다. 이제 삶을 바꾸자’ 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것이었다.

연구실을 비우느라 오랜만에 방을 구석구석 뒤졌다. 그런데 어떤 책갈피에서 누렇게 바랜 종이 몇 장을 발견했다. 내가 이화여대에 들어오자마자 써놓은 메모였다. 학교에 오기 직전 운영했던 출판사 ‘문조사’의 이름이 인쇄된 원고지 석 장의 뒷면에 볼펜으로 적어놓은 것이었다. ‘작곡할 때 스스로 지켜야 할 점’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며, 리듬과 악상·주제를 어떻게 요리해야 하는지에 대해 명심할 내용을 담은 글이었다. 젊었을 때 내가 이런 생각을 다 했었나. 참으로 감개무량했다. 젊은 시절의 패기를 되새기며 학교를 나섰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