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가 주부 허리를 걱정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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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세탁기가 사람을 섬겨야지 사람이 세탁기를 섬겨서야 되겠습니까.”

박선후(49·사진) 대우일렉트로닉스 세탁기 연구소장은 3년 전 허리가 불편하다는 아내가 드럼세탁기 앞에 쪼그리고 앉아 세탁물을 힘겹게 꺼내는 모습을 보고 신제품 개발에 나설 생각을 했다. 드럼의 위치를 바꾸는 데서 해결책을 찾았다. 드럼을 11㎝ 위에 배치하고 15도 정도 위를 보도록 만든 ‘드럼 업’ 세탁기를 지난달 하순 출시한 것이다.

지난해 국내 한 회사가 받침대를 세워 드럼 위치를 높인 제품을 내놨지만 이것과는 원리가 다르다는 주장이다. 한 일본 제품도 드럼을 45도 각도로 기울인 모델을 선보였지만 세탁력이 떨어져 손님을 끌지 못했다. 그는 “선 채로도 드럼 내부가 다 보이고 쉽게 세탁물을 꺼낼 수 있어 소비자는 드럼이 40도 이상 위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고 설명했다.

개발 과정은 험난했다. 무거운 드럼을 위로 올리고 기울이기까지 하니 소음과 진동이 커지는 문제가 생겼다. 8000만원을 들여 만든 시제품을 폐기하고 연구원 10명과 함께 고등기술연구원(IAE) 소음진동 파트에 들어가 반년간 침식을 잊고 연구에 몰두했다. 결국 자동차 완충장치에서 해결책을 찾아 소음을 기존 세탁기의 절반 수준인 50㏈까지 낮췄다는 것.

박 소장은 입사 후 24년째 세탁기 개발만 해 온 장인이다. 고려대 전기공학과를 나와 1984년 대우일렉의 전신인 대우전자에 공채 1기로 입사했다. 엔지니어였지만 대리 시절인 90년대에 수출팀으로 옮겨 40여 개국을 돌며 영업을 했다. 당시 뜨던 이른바 ‘세일즈 엔지니어링’의 초기 세대다. “기술력뿐만 아니라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을 만드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고 회상했다. 이런 경험은 대우가 17년째 생산하는 최장수 제품 ‘공기방울 세탁기’를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박 소장은 드럼업이 공기방울에 이어 간판 상품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기대했다. 원래 드럼 방식은 물이 좋지 않은 유럽에서 온수로 세탁하려고 개발된 원리다. 물을 적게 쓰고 세탁물 손상이 적다는 장점이 있지만 구조적으로 세탁물을 위에서 넣고 꺼내는 일반 세탁기보다 사용하기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양판점 판매 실적에서 일반세탁기 매출이 드럼을 제치기도 했다. 박 소장은 “이번 제품은 드럼세탁기의 장점에 일반세탁기의 편리성을 더한 3세대 제품”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 제품이 히트해 지난해 무산된 매각작업을 다시 진행하는 데 작은 보탬이라도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김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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