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못 찾겠다” 어린 추억 … 슬픈 ‘도돌이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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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조용필 1집부터 11집까지가 80년대에 나왔는데, 80년대 중반 대학생이 된 내가 겪은 현대사와 감성은 그렇게 답하고 있었다.

80년대가 뭐지? 중·고생이었던 80년대 초·중반 당시의 나로 돌아가서 다시 말하라면 “그때는 조용필의 시대였어요”라고 또 다른 기억이 답한다. 누이가 사온 영화음악 LP판 전집을 통해 팝과 록을 맛보며 우쭐했던 그때, TV만 틀면 그가 나왔고 해마다 연말이면 상이란 상은 그가 휩쓸었으며, 툭하면 그의 스페셜 쇼가 방영됐다. 과외 금지였던 그 시절 나는 당시 20대 청춘이었던 누이와 함께 TV를 보며 저녁나절을 보냈고, 딱 그만큼 그의 모습과 그의 노래와 그의 패션을 접하며 80년대의 대중문화를 호흡했다.

그중 ‘못 찾겠다 꾀꼬리’는 또래 남자 애들이 모두 후렴구를 흥얼거렸던 최신 유행가였고, 캠퍼스 그룹을 결성한 교실 뒷줄의 몇몇 친구는 드럼이나 기타를 입소리로 연습하던 어려운 곡이었다. 나는 전자의 부류에 속했다. 이 노래는 조용필의 터져 나오는 보컬은 물론 시종일관 꽉 찬 록 사운드 때문에 시원하고 상쾌했으며 달뜬 기분을 줬다. 또한 “못 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나는야 오늘도(언제나) 술래” “얘들아 얘들아 얘들아”처럼 반복되는 소절은 그것만 따라 부르게 하는 중독성도 컸다.

하지만 10대를 마치고 20대를 보낸 10여 년간 이 노래는 조용필의 다른 노래와 함께 내게서 멀어졌다. 20대의 나에게 충격과 분노로 들이닥친 80년대는 주류 가요의 ‘권좌’에 올랐던 조용필의 자리를 남겨두지 않았다. 민중가요와 함께 부르기엔 ‘못 찾겠다 꾀꼬리’는 너무 신났고 화려했으며 야했다. 그런데 30대가 되자 친구들은 하나 둘 노래방에서 그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너 그 노래 좋아했었니?” “그랬다”는 친구도 있었고, 그땐 스쳐 들었는데 이 나이가 되니 저절로 부르게 된다는 친구도 있었다.

그렇게 조용필은 노래방에서 친구들의 노래와 함께 다시 찾아왔다. 누가 독창하든 조용필 노래는 대부분 허밍으로라도 합창하며 끝났다. ‘못 찾겠다 꾀꼬리’가 특별했던 것은, 이 노래가 원래는 응원가나 데모송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고래고래 온몸을 쥐어짜 토해내듯 처음부터 ‘떼창’으로 내달렸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이면 가슴 밑바닥에 슬픔이 고였다. 90점 점수가 나와도 다들 소파에 기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왜 이러지?” 이 이상한 기분 탓에 ‘못 찾겠다 꾀꼬리’는 유령처럼 다시 내 앞에 출몰했다.

“그 많던 어린 날의 꿈이 숨어버려 / 잃어버린 꿈을 찾아 헤매는 술래야 / 이제는 커다란 어른이 되어 / 눈을 감고 세어보니 지금의 내 나이는 / 찾을 때도 됐는데 보일 때도 되었는데…” 한 친구는 이 가사가 노래방 모니터에 굵은 글씨로 뜨는 순간 눈물이 날 뻔했다고 했다.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를 쭉쭉 당차게 뽑아낼수록 비애감이 스물스물 차오르는 건 가사 때문이었을까.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 2005년, TV에서 조용필의 평양 콘서트를 봤다. 두 번째인가 세 번째인가 ‘못 찾겠다 꾀꼬리’가 나왔다.

“꺅꺅” 소리가 나와야 할 그 순간에 평양 관객은 얼어붙은 것처럼 조용했다. 그때 문득 느꼈다. “아, 나의 80년대는 평양 저기처럼 멀리 가 있구나. 내 청춘도 거기 있구나.” 그때 나는 이 노래를 짜릿하게 느끼면서도 싫어하려고 애썼구나 하고. 2008년 지금, 80년대와 조용필을 겹쳐 떠올릴 수밖에 없는 풍경은 내 것이 됐다. 그래서 ‘못 찾겠다 꾀꼬리’는 혼자 가볍게 흥얼거리든 노래방에서 빽빽 고함치며 합창하든 점점 더 슬퍼진다. 아니 이 노래는 첫선을 보인 그때부터 슬픈 노래였는지도 모르겠다.

김종휘 <문화평론가·하자센터 기획부장>



조용필 그때 내 마음은 …

 ‘못 찾겠다 꾀꼬리’는 ‘고추잠자리’와 함께 동심을 표현한 노래다. ‘고추잠자리’를 발표한 지 1년 만에 내놓았다. ‘고추잠자리’를 작사했던 김순곤씨가 또 가사를 썼다.

이 노래는 ‘고추잠자리’와 정서는 비슷하지만, 템포는 전혀 다르다. 강한 비트를 넣어 록의 느낌을 강하게 했다.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보자는 데 중점을 뒀다. “얘들아~” 대목의 화음이라든지, 당시 국내에는 없던 음악을 만들어보자는 뜻이었다. 록에 국악을 접목한 ‘자존심’을 만든 것처럼, 새로운 시도로 가요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가사적으로는 동요와 접목을 시도했다. ‘난 아니야’도 그런 경우인데, 두 노래 모두 4집(1982년)에 수록됐다. 무등타기·술래잡기 등은 나 개인의 추억일 뿐 아니라 중장년층의 추억이기도 하다. 동요는 성인이 되면 잊어버린다. 이 때문에 어른이 돼서도 부를 수 있는 동요적인 가요를 만들고 싶었다. 노래를 부르며 순수했던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노래 말이다.

반응도 뜨거웠다. TV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 횟수를 제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노래뿐만 아니라 제목 ‘못 찾겠다 꾀꼬리’ 자체가 유행어가 됐던 기억도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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