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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위는 내각이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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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인수위의 근거 법령인 ‘대통령직 인수에 관한 법률’ 제7조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업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첫째, 정부의 조직·기능 및 예산 현황의 파악. 둘째, 새 정부의 정책기조를 설정하기 위한 준비. 셋째, 대통령의 취임행사 등 관련 업무의 준비. 넷째, 그 밖에 대통령직의 인수에 필요한 사항. 이게 전부다. 그 어디에도 새 정책을 입안해서 제시·공표하거나 그것을 강제할 그 어떤 근거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수위는 휴대전화 요금 문제부터 시작해 광역경제권 계획을 거쳐 영어 공교육 문제에 이르기까지 온갖 사안에 대해 하루가 멀다 하고 새 정책을 입안해 공표하고, 심지어 곧장 집행할 것처럼 움직이고 있다. 인수위가 말하면 곧장 법이 되고 인수위가 움직이면 곧장 시행돼 효력이 발휘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것은 엄연한 월권이며 국민 기만이다. 인수위는 내각이 아니다. 결정기관도 집행기관도 아니다. 한시적인 준비기관일 따름이다. 하지만 지금 인수위는 그 자체가 마치 내각처럼 행동한다. 언론도 이것을 여과 없이 그대로 보도해 국민 대다수는 인수위가 대단한 권력기관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

지금 온 나라를 벌집 쑤셔놓은 것처럼 만든 영어 공교육 문제도 이렇게 거창하게 판을 벌여 놓을 일이 아니다. 글로벌 시대에 뒤처지지 않게 실제 써먹을 수 있는 영어교육을 실질화하자는 원칙적 수준에서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는 공청회를 열고 이를 반영해 밑그림을 그릴 준비를 하는 선에서 그쳤어야 옳았다. 영어교사 수급, 한국어의 영어표기법 등 구체적 사항은 인수위가 아니라 새 정부가 출범한 후 전개할 일이다.

지금 시급한 것은 파행으로 점철돼 온 국가의 정상화다. 그 정상화 과정의 첫 단추여야 할 인수위가 또다시 월권적이고 비정상적인 행보를 해선 곤란하다. 더구나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10년 만에 다시 잡은 정권이다. 그 10년의 공백을 가볍게 보면 큰코다친다. 과거 10년 전에 제아무리 날고 기는 국정 운영 능력이 있었다 해도 10년 동안 정권의 핸들을 놓고 있었기에 운전감각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가 대한민국이란 차를 제대로 운전하려면 차량에 대한 대대적인 점검은 물론이거니와 좀 더 세밀하게 핸들과 액셀러레이터 및 브레이크 등에 대한 운전자의 감각 조율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수위가 할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지금 인수위는 당장 시동을 걸어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대며 공회전을 남발하고 있지 않은가.

인수위보고 손 놓고 있으란 말이 결코 아니다. 밑그림 그리고 준비하는 데 충실하라는 것이다. 15년 전 김영삼 정부가 처음 출범할 때 당시 인수위에서는 ‘효자동 100일 계획’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안가 철거, 청와대 개방,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까지 모두 그 안에 밑그림이 담겨 있었다. 물론 실행은 새 정부가 출범한 그날부터였다. 인수위는 준비하고, 실행은 새 정부의 내각이 할 일이다.

17대 인수위는 역대 인수위 중에서 가장 열심히 일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인수위 출범 한 달 만에 처음으로 하루 휴가를 줬다고 박수가 터져나올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무조건 열심히만 한다고 다가 아니다. 할 일과 해선 안 될 일을 성숙하게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인수위의 정상화를 기대해 본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