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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꼴통 보수'를 버려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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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요즘 이런저런 일로 정치적 곤경에 놓여 있긴 하지만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최근 3선(選)에 도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현지 여론의 동향을 볼 때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닌 듯하다. 오늘날 3기 연속 집권의 꿈을 키우고 있지만 블레어가 등장하기 전까지 영국 노동당은 정치적으로 아주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 英 노동당 '현대화' 통해 재집권

극심한 경제적.사회적 혼란을 겪은 '불만의 겨울'을 겪고 난 뒤 노동당 정부는 그 실정(失政) 때문에 1979년 선거에서 마거릿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에 권력을 넘겨주어야 했다. 이후 잇따라 세차례 선거에서 패배했고 97년 승리할 때까지 무려 18년 동안 야당 신세에 머물러 있었다. 노동당은 83년 선거에서 최악의 패배를 경험한 이후 당수도 바꾸고 당 체질 개선을 위해 노력했지만 87년과 92년 선거에서도 이기지 못했다. 특히 92년 선거에서는 인두세 파동 등으로 보수당의 인기가 추락했던 시점이었지만 집권하지 못했다. 입만 열면 국민과 민족을 말하는 것이 정치인이지만 정당은 결국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정치인들의 집단이다. 선거에서 잇따라 패하게 될 때 이들이 갖게 되는 좌절감이나 무력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노동당이 변화한 것은 토니 블레어의 등장 이후다. 블레어는 노동당에 대한 유권자들의 이미지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영원히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위기감 속에 등장했다. 블레어는 승리를 위해서는 당을 현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핵심은 과거 노선으로부터의 철저한 이탈, 즉 전통적 사회주의 색채의 약화와 포기였다. 블레어의 판단은 노동당이 노조에 끌려다니고 사회주의 정책에 매몰돼 있다는 인상을 주는 한 유권자들의 신뢰를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블레어는 이를 위해 당내외의 격렬한 반발을 무릅쓰고 주요 결정과정에서 당의 핵심 지지기반인 노조의 영향력을 약화시켰고, 노동당의 상징적 조항이었던 사회적 소유를 규정한 당헌 제4조를 폐지했다. 블레어의 '신노동당' 정책은 당의 지지기반 확대를 위해 금과옥조와 같은 당의 이념적 토대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기부정의 과정을 겪은 이후에야 노동당은 18년 만에 재집권하는 감격을 맛볼 수 있었다.

요즘 한나라당이 소란하다. 제2창당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솔직히 이러한 한나라당의 변신 움직임에 그리 큰 기대감을 갖고 있지는 않다. 한나라당을 '꼴통 보수'라고 부르는 까닭은 시대의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꼴통'이라는 표현 속에 담겨 있는 의미는 경직성과 편협함이다. 지난 대선 직후 한나라당은 변화를 갈망하는 유권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데 실패한 것이 패인이었다는 뼈아픈 반성을 했다. 그러나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하락하면서 한나라당은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흥미롭게도 盧대통령의 인기 추락이 한나라당의 자기반성과 자기혁신의 시급함을 잃게 한 것이다.

*** 이념적 개혁 이끌 지도자 나올까

과거 영국 노동당의 금과옥조가 사회주의적 강령이었다면, 지금 한나라당의 금과옥조는 경상도.반공.개발국가의 논리인 듯 보인다. 지금 한나라당이 많은 국민에게 적절한 대안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까닭은 잇따른 패배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논리에 매몰돼 근본적인 자기부정이나 혁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금과옥조처럼 지켜온 이러한 논리에서 과감히 벗어나 이를 '현대화'하지 못한다면 제2창당이 아니라 어떤 외형적 변화에도 지지를 확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문제는 당의 구성원들이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있는지, 자기부정의 개혁을 이끌어낼 지도자가 등장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영국 노동당이 선거에서 잇따라 네번 패배하고 18년 동안 야당 생활을 한 것과 비교하면, 1997년과 2002년 '겨우' 두번 패했고 그나마 그 사이 2000년 총선 이후에는 국회를 장악해온 한나라당으로서는 아직도 '여유'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가야 할 길은 아직도 한참 더 남은 듯이 보인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정치외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