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약금 줄 테니 계약 파기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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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1000여 개의 오피스 빌딩이 모여 있는 강남 테헤란로. 요즘 이 지역 오피스 빌딩 매매가는 3.3㎡(평)당 2000만원을 넘고 있다.

얼마 전 국내에서 활동 중인 한 다국적기업은 황당한 일을 겪었다. 새로 세워질 빌딩에 입주하기로 시행사와 계약했는데 시행사가 일방적으로 그 계약을 파기했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계약 파기 6개월 전 서울 종로구 청진5지구에 세워질 빌딩에 3.3m2(1평)당 1200만원에 입주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3개월 후 시행사에서 계약을 재조정하자는 요청이 들어왔다. 3.3㎡당 1800만원을 달라는 것이었다. “기존 계약이 너무 싸게 이뤄졌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미 끝난 계약이라며 회사는 거절했지만 빌딩 시행사도 물러서지 않았다. 위약금을 물고 계약을 파기했다.

시행사 측은 “입주 문의를 해오는 업체가 많다”며 “1800만원 이상을 받으면 위약금을 물고도 남는다”고 설명했다.

갈 곳 없는 뭉칫돈 유입

요즘 국내 주택시장은 한겨울처럼 꽁꽁 얼어있다. 하지만 오피스 빌딩(업무·사무 전용 빌딩) 시장은 반대다. 뜨거운 훈풍이 불고 있다. 지방에서는 미분양 아파트가 속출하고 있고, 수도권에서는 거래량이 2006년 대비 30% 이상 줄어들고 있는 주택시장과는 반대다. 오피스 물건은 없어서 못 팔 정도다. 당연히 매매가와 임대료가 급등하고 있다.

최근 거래가격 동향을 보면 이런 추세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서울 서초·강남 지역의 경우 2007년 2분기의 오피스 매매가는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43.5%나 올랐다. 오피스 시장의 또 다른 주요 거점으로 부각되고 있는 서울 여의도·마포 지역은 11%, 종로·광화문 지역은 17.3%나 상승했다.

특히 서울 강남 테헤란로에 위치한 몇몇 빌딩의 경우 3.3m2당 최근 거래가격(연면적 기준)은 2000만원을 호가하고 있다.

현재 서울 강남지역에서 가장 임대료가 높은 빌딩은 강남파이낸스센터(옛 스타타워)다. 현재 임대료는 3.3m2당 보증금 88만원에, 월세 8만8000원이다. 330m2(100평)을 빌린다면 보증금 8800만원에 월세 880만원을 내야 한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이 빌딩의 임대료는 3.3m2당 보증금 60만원에, 월세 6만원을 넘지 않았다. 30% 이상 증가한 것이다. 2005년까지 강남을 비롯한 서울 지역 오피스 임대료의 평균 인상률은 6% 안팎이었다. 엄청나게 오른 셈이다.

오피스 값이 갑자기 급등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업계에서는 ‘공급 부족’을 가장 큰 이유로 꼽고 있다. 지난해 10월 삼성증권 투자전략센터는 국내 오피스 시장의 수급 불균형이 가장 큰 문제점이라는 보고서를 낸 적이 있다. 경제성장률이 5%라면 시장 수급을 위해 180만m2(54만 평)가 추가 공급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03년부터 2006년까지 국내 평균 경제성장률은 4.2%였다. 보고서대로 하면 매년 150만m2(45만 평) 이상의 오피스가 공급됐어야 했다. 하지만 2000년 이후 공급 면적은 매년 100만m2(30만 평) 수준이었다. 해마다 50만m2(15만 평)가량이 공급되지 못한 것이다.

수급 불균형의 문제점은 오피스 빌딩 공실률(업무용 빌딩에서 비어 있는 사무실이 차지하는 비율)에서도 알 수 있다. 국토연구원 조판기 연구원은 “업계에서는 빌딩의 공실률이 5% 수준이면 오피스 시장의 수요과 공급이 일치하는 것으로 평가한다”고 말했다. 공실률이 5% 미만이면 수요가 높은 것이고, 5%를 초과하면 공급이 높은 것이다.

2007년 10월 기준으로 볼 때 서울 지역의 공실률은 극히 낮은 수준이다. 서울 서초·강남은 1.1%, 종로·광화문과 여의도·마포는 1.3%다. 서울 나머지 지역도 평균 3.6%로 5%에 한참 못 미친다. 빌딩 자산관리 업체 샘스의 이한승 투자자문팀장은 “현재 서울 주요 도심지역의 공실률을 보면, 공급보다 수요가 많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둘째는 오피스가 새로운 투자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점이다. 골드먼삭스, 론스타, 매쿼리 등 해외 금융기업은 2003년 들어 국내 오피스 빌딩을 사들였다. 그리고 얼마 전 대부분을 매각했다. 이 과정에서 두 배 이상 차익을 봤다.

이한승 팀장은 “해외 금융기업들을 보면서 익힌 학습효과와 오피스 빌딩이 6% 이상의 수익률(매매가 대비)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투자자들의 돈을 이끌어 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국내 주택시장의 기대수익률은 5%도 안 된다.

예를 들어 지난해 초 국민연금은 ‘국민연금기금 중기(2008~2012년) 자산배분’ 전략을 세웠다. 전략의 주요 골자는 사회 기반시설이나 오피스 빌딩 등에 대한 대체 투자를 확대한다는 것이다. 다른 부동산 투자보다 오피스 빌딩의 수익 안정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얘기다.

주택담보인정비율(LTV) 등 각종 아파트 규제와 달리 오피스는 비교적 규제가 덜한 편이다. 또 법인이 오피스 빌딩을 매입했을 경우 일정 금액의 법인세도 감면 받을 수 있다. 갈 곳 없는 뭉칫돈이 오피스 시장으로 몰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2009년부터 시행되는 자본시장통합법(자통법)도 오피스 빌딩의 값을 올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 자통법은 외국계 금융회사를 국내로 불러들였으며, 이들은 교통이 편리한 강남지역과 광화문 일대에 사무실을 얻고 있다.

한국씨티은행 조성곤 전략영업센터장은 “자통법 시행이 결정된 2007년 하반기부터 외국계 금융회사들의 본격적인 국내 진입이 시작됐다”며 “지난해만 해도 크고 작은 외국계 금융회사가 대거 강남지역에 몰려 들어왔다”고 설명했다.

외국계 금융회사 대거 몰려와

미국계 증권회사인 메릴린치는 맵스자산운용과 공동 투자해 을지로 오피스 빌딩을 8432억원에 매입했다. 부동산리츠회사인 코람코도 본격적인 한국시장 공략을 위해 광화문 도심재개발사업에 뛰어들었다. 직접 오피스 빌딩을 짓겠다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단기간의 오피스 가격 급등은 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소리도 나오고 있다. 박덕배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공급 부족으로 가격이 오르는 것은 인정하지만 강남지역 오피스 매매가가 1년 만에 40% 이상 뛴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실수요 외에 투기적 요소가 가격을 필요 이상으로 끌어올린다는 얘기다. 그는 “수요와 공급이 일정해질 것으로 예측되는 2010년까지 오피스 매매가 상승률은 10% 안팎이어야 적당하다”고 덧붙였다.

최남영 기자 hinew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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