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돈 6조8000억원 날린 31세 케르비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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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은행 소시에테 제네랄(SG) 다니엘 부통 최고경영자(CEO)가 24일(현지시간) 파리 외곽의 본사에서 열린 기자회견 중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파리AP=연합뉴스]

 규정을 어기고 ‘몰빵’ 거래로 72억 달러(6조8000억원)를 날린 장본인은 입사 8년차 행원이었다. 제롬 케르비엘(사진), 31세. 프랑스 2위의 은행인 소시에테 제네랄(SG)은 직원 한 사람 잘못 관리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손실을 메우기 위해 80억 달러의 급전을 마련하느라 사방에 손을 내미는 중이다. 25일 프랑스 언론은 케르비엘을 1995년 영국 베어링 은행의 파산을 불러온 닉 리슨에 비유하며 ‘프랑스의 닉 리슨’이라고 부르고 있다. 미국 언론들은 “케르비엘과 SG가 이번 주 세계 증시 폭락사태를 몰고 온 장본인”이라고 지목했다. SG가 케르비엘의 부당 파생상품 거래 사실을 숨긴 채 이를 청산하는 바람에 세계 증시 폭락을 불렀다는 것이다.

 ◇회사 속이고 몰빵 거래=2000년 SG에 입사해 2005년부터 선물거래를 맡은 케르비엘은 주가지주선물을 통해 위험을 피하는 거래(헤지)를 맡았다.

예컨대 은행이 유망한 기업의 주식을 사들이는 경우 선물은 주가가 떨어지는 쪽으로 거래를 해 큰 손실이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위험을 피하는 대신 이를 감수하기로 했다. 회사가 정한 거래 한도는 2900만 달러였지만 250억 달러에 달하는 거래를 했다. 파생 금융상품은 손에 쥔 현금이 많지 않아도 신용으로 대규모 거래를 할 수 있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SG 등 유럽의 대형 은행들은 베어링 은행이 파산한 이후 직원들이 과도한 거래를 하는지 감시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놨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사전에 은행의 보안 시스템을 파악한 뒤 허위 자료를 보고해 감시를 피해 갔다. 증시 전문가들은 “케르비엘이 작은 규모의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계속 거래 규모를 늘려 갔고 마지막엔 한 곳으로 투자를 했던 것 같다”고 분석했다. 그는 결국 지난 주말 은행 감사팀에 꼬리를 잡혔다. SG 측은 이번 주초 프랑스 중앙은행에 이 사실을 보고하고 케르비엘이 한 거래를 은밀히 청산한 뒤 24일(현지시간) 손실 내용을 공개했다.

 ◇‘검은 월요일’의 주범?=미국의 증시 전문지인 마켓워치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FRB가 SG 사태를 충분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금리 인하 결정을 했다”고 보도했다. FRB는 21일 아시아에 이어 유럽 증시가 폭락하자 22일 전격 금리 인하를 단행했다. 그러나 21일 유럽 증시 폭락은 SG가 케르비엘이 벌여 놓은 거래를 청산하기 위해 250억 달러에 이르는 유럽 증시의 주가지수선물을 시장에 쏟아내면서 촉발됐다는 것이다. 유럽의 주가가 더 떨어질 것이라고 보는 선물이 대량으로 시장에 나오자 놀란 투자자들이 투매에 나서면서 주가가 급락했다는 것이다.

마켓워치는 “FRB는 프랑스 중앙은행으로부터 어떤 통보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며 “결과적으로 벤 버냉키 FRB 의장은 시장에 과도하게 반응한 셈이 됐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이번 주 세계 증시의 폭락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타격을 입은 미국의 채권보증회사인 암박의 신용등급 강등으로 일어난 것으로 봐야 한다”며 “21일 유럽 증시에 앞서 열린 아시아 증시가 이미 폭락했다”고 반박했다.

김원배 기자

◇주가지수선물(Stock Index Futures)=코스피나 다우지수처럼 증시의 주가지수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것이냐를 예측해 일정한 날에 일정 가격에 매매를 하기로 정하는 것. 주식을 사고 주가지수 선물을 팔면 주가가 떨어질 때 위험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선물만 대량 거래하면 큰돈을 벌거나 무한대에 가까운 손실을 입을 수도 있다.

◇닉 리슨=1995년 영국 베어링 은행의 중개인으로 일하면서 회사 몰래 도쿄 증시의 주가지수선물 거래를 하다 13억 달러의 손실을 냈다. 당시 28세. 파산한 베어링 은행은 단돈 1달러에 네덜란드 ING그룹에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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