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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원전 ‘계속 운전’이끈 대화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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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지난해 12월 18일 오후 국민의 귀와 눈이 대통령 선거에 쏠려 있던 시간, 부산시 장안읍사무소에서는 한국 사회가 주목해야 할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고리 원전 1호기 계속 운전을 둘러싼 갈등을 해결하고 지역사회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구성된 ‘고리원전 주변 지역 발전협의회’가 다섯 차례 논의를 거쳐 합의에 도달한 것이다.

이번 합의는 2006년 6월 이후 고리원전 1호기 계속 운전 반대 운동에 앞장서 온 지역반대 단체 두 곳과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등 이해관계자가 모두 참여해 전원 합의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다. 지역 주민과 한수원이 수많은 대립과 갈등을 통해 얻은 학습효과임과 동시에 협의회가 구성되기까지 2년간 1100여 회의 개별 접촉과 설명회를 거치면서 지역과 한수원이 펼친 공존·공생을 위한 진지한 노력의 결과였다.

합의가 가능했던 요인을 살펴보면 첫째, 지역 주민은 한수원이 공기업체로서 요구를 수용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하게 됐다. 사업 주체인 한수원은 주민들이 요구하는 ‘안전성(security)’이 자신들이 주장해 온 과학기술적인 의미에서의 ‘안전성(safety)’과 차이가 있음을 알고 주민들의 요구를 수용하고자 노력했다. 지역 주민과 한수원이 원자력과 관련된 문제를 인식하고 접근하는 방식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둘째, 한수원은 부안·경주 방폐장 사태 등을 거치면서 합의의 중요성과 집단적 논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돈보다도 서로를 인정하고 동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학습하게 되었다. 지역 주민 또한 경험을 통해 투쟁이 아니라 현실적인 논의와 합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됐다. 문제 해결 방식의 변화가 온 것이다.

셋째, 권력 실세에 접근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 지역사회에서 실제로 대표성을 갖고 있는 인사들과 협의체를 구성했다. 논의 주제를 그들로부터 이끌어냄으로써 지역 주민이 실제로 원하는 문제에 접근할 수 있게 되고, 합의에 대한 주민 수용성을 높일 수 있게 됐다. 논의 체계와 논의 방식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넷째, 지역 주민들은 실제적인 요구를 했고 협상에 참여한 한수원 경영진은 이런 지역 주민들의 요구를 할 수 있는 부분과 할 수 없는 부분으로 명확하게 구분하고 양해를 구했다.

이번 합의는 지금까지 국내의 많은 사회적 갈등 봉합과는 다른 갈등 해소의 선례를 남기며 진일보한 사회적 합의 형성을 이끌어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박태순 사회갈등연구소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