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을찾아서>이영진 詩集 "숲은 어린짐승들을 기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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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80년대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하며 광주항쟁 이후의 암울한상황을 절절하게 노래해온 이영진이 『6.25와 참외씨』이후 10년만에 두번째 시집 『숲은 어린 짐승들을 기른다』(창작과 비평사刊)를 냈다.
이씨는 이번 시집에서 스물다섯에 겪은 광주의 상처와 절망을 넘어 신생을 꿈꾸는 다양한 탐색의 시편들을 선보인다.이씨에게 젊음은 『달아오른 참숯을 집어삼키고 겁없이 마구 꽃잎을 게워내던』 시절이다.그러나 이제 불혹의 나이 마흔.이씨 는 『하늘을헤아리지 않아도 나이 사십의 밤하늘에 별이 뜨고 더러 눈도 내리고 곪은 상처가 터져 꽃이 피더니 임종하는 법도 알 것 같다』고 한다.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이씨는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이름도 얼굴도 모르고 앞으로 만날지 안 만날지 알수도 없는 가상의 인간을 사랑하게 됐다.이 실속없는 사랑에 이씨는 10년을 허비했다.그러나 아깝지는 않다.그 시간 동안 상처 에서 꽃이 피더라고 그는 말했다.
대상없는 사랑을 통한 상처의 치유.이씨는 그 사랑을 「작은 것」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한다.광막한 우주공간에서 하루살이와 같은 삶을 이어가는 인간의 왜소함에 대한 연민.
『너를 보면 세계의 비밀이 보인다.까닭없이 설레는 가슴 그 눈먼 사랑의 막막한 속내까지도 훤히 헤아릴수 있다….너는 세계의 비밀.그 시작이고 끝이다….불을 향해 길 떠나는 긴 그림자여 목숨보다 먼저 우리를 끌어 당기는 저 아득한 불빛들의 속삭임,불빛 속으로 까맣게 날아드는 날개들의 아름다운 산화.』(『하루살이』).
이씨는 하루살이의 생태에서 삶의 원형적 이미지를 발견한다.육체에 감금되고 시간에 호송돼 가면서도 끊임없이 「아득한 불빛들의 속삭임」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그러다 소멸되고야 마는 존재. 얼핏 이같은 이미지는 절망적인 인상을 준다.그러나 이씨는 불빛을 향해 날아가는 비상의 몸짓을 「아름다운 산화」라고 말한다.가장 왜소한 인간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다.이역설적 미학이야말로 가장 넉넉한 사랑이 아닐까.
『떠나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우린 몸으로 압니다.방금 떼어놓은 발자국마저 순식간에 흩어져 흔적 없어도 그대 함께 걸어왔던 거리만큼 세상은 깊어져 새로이 길이 트이고 풀섶마다 이름없는 꽃이 핍니다….』(『은행나무』).
결국 이씨가 꿈꾸는 사랑은 생명에 대한 연대감으로 충만한 사랑이다.숲과 같이 제 몸의 자양분으로 어린 짐승을 길러내는 그런 사랑이다.
『욕망은 큰 것을 추구하고 사랑은 작은 것을 지향한다고 믿어왔습니다.욕망이 크면 상처도 크겠지요.광폭하게 질주하는 현대문명의 탐욕은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것 같습니다.작은 것에대한 사랑이 에이즈보다 더 강한 희망의 바이러스 로 번져 나가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글 :南再一기자 사진:金澈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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