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도 대학도 모두 시장에 맡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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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 수도 류블랴나의 중심가인 초포바 거리에 생기가 넘친다. 젊은이들이 붐비는 이곳에는 맥도널드와 같은 패스트푸드점, 패션용품 매장이 몰려 있다. 최근에는 일본·태국 음식 등 이국적인 요리를 파는 고급 식당도 늘고 있다. 여름이면 거리 곳곳에 들어선 서유럽 분위기의 노천 카페에서 고급 와인을 마시며 시가를 피우는 손님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사진=류블랴나(슬로베니아)=전진배 특파원]

 동유럽의 슬로베니아가 포르투갈에 이어 올 1월부터 유럽연합(EU) 순회의장국이 됐다. 국토 면적은 남한의 4분의 1이 안 되고, 인구는 200만 명에 불과하다. 이런 작은 나라가 쟁쟁한 유럽의 리더가 됐다. 1991년 옛 유고 연방에서 독립한 뒤 10여 년 동안 눈부시게 발전한 슬로베니아의 성공 스토리는 서유럽에서도 큰 관심거리다. 강대국 틈바구니에 끼인 작은 나라가 짧은 시간에 선진국 문턱까지 오게 된 비결을 알아보기 위해 현장을 찾았다.

■류블랴나=전진배 특파원

“자본주의는 크리스마스 선물”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 브르닉 공항에서 본 첫인상은 ‘모던’함이다. 지난해 보수공사를 마친 브르닉 공항은 서유럽 공항보다 시설이 좋다. 신문 가판대에 영자신문의 헤드라인이 인상적이다. ‘자본주의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91년 유고 연방에서 독립한 이후 슬로베니아는 2년여 동안 큰 경제 위기를 맞았다. 마이너스 성장에 치솟는 실업률, 물가 폭등으로 인해 이 나라를 떠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때부터 슬로베니아에 자본주의 체제가 본격 이식됐다. 철저하게 자율과 경쟁 원리에 따랐다. 국영기업은 대거 민영화했다. 정부가 통제하던 가격제도를 시장에 맡겼고, 정부가 통제하는 품목은 최소화했다.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큰 류블랴나은행 부행장을 지낸 이반 루돌프는 “정부가 손을 놓자 슬로베니아 경제가 혼수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땜질식 처방을 하지 않고 더욱 과감하게 시장경제를 심은 게 약이 됐다”고 말했다. 전기와 석유 가격 외에는 모두 시장이 알아서 한다.

“서유럽보다도 더 자본주의적”

 기업 운영에도 대폭 자율 권한을 부여했다.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큰 겨울 세일이 7일 시작됐다. 쇼핑몰끼리 서로 경쟁을 벌인다. 먼저 시작한 곳도 있다. 서유럽에서 가장 큰 세일을 하는 프랑스의 경우 9일 일제히 세일을 시작했다. 세일 기간은 6주를 넘지 못하도록 법으로 제한한다. 그러나 슬로베니아는 세일 기간과 폭을 모두 업체 자율에 맡겼다. 업무시간도 길어졌다. 시내 슬로벤스카 체스타의 쇼핑센터는 요즘 오후 9시까지 문을 여는 곳도 있다.

 고용의 유연성도 커졌다. 실업률이 높았지만 기업이 해고를 더욱 쉽게 하는 극약 처방을 했다. 해고가 불가능한 경직된 고용 환경 때문에 실업률이 계속 높아진다는 판단에서다.
 5년쯤 지나면서 경제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90년대 말부터 실업률이 떨어지고 성장률은 5% 안팎을 유지했다. 유럽 경제가 침체된 시기였던 점을 감안하면 빠른 속도의 발전이다.

 세제 개혁도 활발하다. 현재 25%인 법인세는 주변국에 비해 높은 편이지만 이를 단계적으로 낮추는 법안을 2006년에 통과시켰다. 루돌프 전 부행장은 “서유럽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자본주의 혁명이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은 2만5000달러(구매력 기준)를 넘어섰다.

단과대끼리 산학협력 따내기 경쟁

 교육에도 자율이 강조되는 분위기다. 특성화 대학을 제외하면 두 개 대학이 전부다. 따라서 대학 간 경쟁은 거의 없다. 대신 단과대별 경쟁 시스템을 시험하고 있다. 최근 국립 류블랴나대는 몇 년 전부터 대학본부가 모두 통제하던 학사 운영을 단과대에 넘겼다. 단과대가 커리큘럼을 잡고, 석사 과정은 학생 선발권도 단과대가 갖게 됐다. 그러면서 단과대별로 우열이 가려지고 있는 것이다. 이 대학에서 화학공학 박사 과정에 있는 루카 데주만은 “ 요즘은 산학 협동이 잘 이뤄지는 공학과 상경계열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상경계열처럼 잘나가는 단과대는 성적 상위 20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해외 유학까지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인기가 있다”고 덧붙였다.

‘슬로베니안 드림’ 이민자 몰려

 류블랴나에서 택시 운전을 하는 마르 얀(33)은 세르비아 사람이다. 얀은 2년 전 백수 생활이 지겨워 부자 나라 슬로베니아로 무작정 건너왔다. 그는 “공산주의는 지긋지긋하다”며 “동유럽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 슬로베니아를 제외하고는 아직도 공산주의 국가 분위기가 풍긴다”고 말했다. 그는 세금을 빼고 600유로(약 84만원) 정도를 받는다고 했다. 슬로베니아가 아니면 이런 돈은 꿈도 꾸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세르비아 등 주변국 사람들에게 슬로베니아는 ‘꿈의 땅’이다. 최근 이들의 불법 체류와 노동이 급증하면서 슬로베니아 정부는 체류증 발급 자격을 대폭 까다롭게 했다. 일부에서는 슬로베니아 체류증이 미국 비자보다 더 받기 힘들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EU 의장국은 또 하나의 도약 발판

 슬로베니아는 순회의장국 기간을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는 좋은 기회로 보고 있다. 이 기간에 130여 개의 회의가 열린다. 슬로베니아를 찾게 될 각국의 대표단과 유럽 의회 관계자, 기자 등이 홍보대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한·슬로베니아 의원협회 회장인 미르코 자메르니 의원은 “서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에 슬로베니아가 알려지면 기업이 진출하기 좋은 환경이 조성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슬로베니아는 의장국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2005년부터 2000명으로 구성된 민관 합동 대책반을 만들었다. 이들은 6개월 동안 슬로베니아를 유럽과 전 세계에 알리는 일을 집중 연구했다.

주요 행사가 열리는 브르도 콘퍼런스 센터 건립에만 1500만 유로(약 210억원)를 투입하는 등 예산도 아끼지 않았다. 현지 언론은 “EU의 A급 우등생을 넘어 이제는 유럽의 리더로 거듭나게 됐다”며 “이를 발판으로 선진국 대열에 합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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