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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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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렇게 되면 점점 더 미궁으로 빠지는 느낌이 드는데요.「정읍사」는 장터로 간 남편을 걱정하는 아내의 사랑가다,아니다 듣기도 민망한 음사(淫詞)다,아니다 임금님 오시기를 바라는 나라사랑의 노래다….』 서여사는 웃으며 제안했다.
『오늘은 어차피 망제봉(望帝峯)까지 답사하긴 어려울 것 같으니 정읍의 문화재들이나 둘러보고 갑시다.』 『돌아보는 김에 정읍사 공원에도 가보시지요.망부상(望夫像)을 조각해 세워놨답니다.』 아리영 아버지.
『그리고 산나물 비빔밥과 정읍약주도 시식해 보셔야지요.』 아리영도 거들었다.
망부상 돌 조각은 드높은 공원 층계 위에 하얗게 서 있었다.
두 손을 다소곳이 포개 모아 먼 곳을 바라보는 여인상.시름에 찬 중년의 얼굴이다.「정읍사」의 주인공도 중년 여인이었을까.
젊지도 늙지도 않는 「사잇해」.
남자에게 있어서의 중년은 「성취」를 뜻한다.나름으로 구축한 세계를 스스로 마주하는 나이 언저리다.성공적인 것이든 아니든자기가 자기 모습을 확인하게 되는 연대.그래서 마흔이 넘으면 남자는 자신의 얼굴 생김새에 책임져야 한다고들 하는 모양이다.
여자의 중년이란 무엇인가.
남편과 자식이 생활의 전부일 수 밖에 없는 경황을 간신히 벗어나 보니 무얼로도 메울 수 없는 텅 빈 자리가 밀려오는 나이의 고비.남편의 인생이 설령 성공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결코 내자신의 것은 아니다.분신이라 믿었던 자식은 더군 다나 아니다.
이미 젊지는 않으나 늙은 것도 아닌,그야말로 사잇해.마음도 몸도 그 사이에서 온통 비어있다.허허로운 하트와 자궁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내장사를 둘러보고 저녁을 들었다.
정읍의 명주는 쌀술이다.달콤하나 뒷맛이 쌉쌀하다.취나물과고사리,갖은 버섯으로 버무린 쌉싸름한 산채밥에 잘 어울린다.
한잔 기울이며 김사장이 새삼스레 얘기를 꺼냈다.
『아까 「고려사」말씀을 하셨는데,그 「고려사」보다 늦게 나온것으로 돼 있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실은 세종14년인 1432년에 지어진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를 밑책삼아 펴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고려사」가 나오기 전이지요.그러니까 「여지승람」의 기록은 「고려사」보다는 「신찬팔도지리지」를 인용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요?』 성실하고 꼼꼼한 성격이라고는 생각했지만,이 사나이는 지금 뭔가 자기표현을 하려는 눈치다.아리영 때문에? 스키웨어형의 앵두빛 점퍼와 몸에 붙는 연분홍팬츠.화려한 아리영의 조화를 길례는 반사적으로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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