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암 강세황展 국립박물관 내달12일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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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길이 28m를 넘는 그의 미공개 대작 『서화축(書畵軸)』도 소개되고 있다.중국 송대(宋代)악부(樂賦)한편을 크고 작은 행서로 옮기고 끝부분에 사군자 그림을 그려 놓은 것이다.그가 말미에 『조속(趙涑.조선중기 화가)이 초서를 쓸 때마 다 끝자락에 난초와 대나무를 그려 받는 사람들이 보배처럼 여겼다.애오라지 그것을 따라 해보았지만 도리어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두렵다』라고 짐짓 겸사를 쓰고 있지만 그의 뛰어난 글씨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작임에 틀림없다.
그외에 진주강씨 문중이 보관해온 자필 초상화.산수화.봉숭아등꽃그림들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과 함께 소개되고 있다.
표암이 살았던 시대는 이른바 화사한 문화가 꽃피던 영.정조(英.正朝)시대다.예조판서를 지냈던 부친이 환갑을 넘어 얻은 만득자(晩得子)였던 표암은 이른 나이에 부모를 잃고 곤궁속에서 청장년기를 보냈다.
61세때 처음 능참봉으로 벼슬길에 올라 그후 한성판윤(漢城判尹.지금의 서울시장)까지 지냈지만 중간의 30여년간은 스스로 자신의 묘지명을 쓰면서 보냈을 정도로 곤고(困苦)의 세월이었다.18세기 문화 속에 우뚝 솟아났던 그의 역할과 위상은 이 시절에 성숙된 학문과 예술이 바탕이 됐다.또 젊은 시절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문하를 드나들며 접했던 실학(實學)의 영향도컸다.『송도기행첩』에 서양화법이 도입된 흔적도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조선시대 꽉 짜인 틀 속에서도 강한 자기 주장을 펴 전문 미술평론가 대접을 받았던 표암 주변엔 많은 서화가들이 모여들어 가르침을 받았다.이미 진경산수의 대가로 명성이 자자했던 겸재 정선(謙齋 鄭.1676~1759)도 그중의 한 사 람이었다.무엇보다 비평가로서 표암의 진가가 두드러진 대목은 자신보다 32세나 어린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1745~1806년 이후)를 발굴해 조선시대 최고의 화가로 올라설 수 있도록 후원한 부분이다. 『표암 강세황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변영섭(邊英燮)씨는 『표암이 화평(畵評)을 남긴 조선시대 작가는 모두 16명,작품은 66점이었으며 이가운데 단원 그림에 대한 것이 23점에 이른다』고 밝혔었다.
이번 전시에도 표암이 화제(畵題)를 붙인 단원의 그림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풍속화병풍』『신선도』등이 함께 소개되고 있다. 이 전시는 표암에 관한 최초의 전시로서 뜻깊지만 문체부가 표암을 「1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고 전시 지시를 내린지 불과 한달만에 꾸며진 전시란 점에서 아쉬움이 없을 수 없다.
사대부 화가지만 어느 누구보다 많은 작품을 남기며 폭넓 은 예술활동을 편 그의 세계를 충분히 조망하기에 이번 전시는 분명히 부족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국립중앙박물관에 애정을 보내는 많은 고미술 관람객들은 그점에서 이미 결정돼 있는 올해 「이달의 인물」들 가운데 더이상 미술인이 없다는데 기묘한 안도감을 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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