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칼럼>不信의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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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 사회를 가상(假想)해보자.그 사회는 경제도 번영하고 제도들도 건실하다.다만 사람들의 말(言)이 모두 거짓이어서 서로 신용을 하지 않는다.말하자면 다른 부분은 완벽한데 구성원들의 언행은 신뢰성이 없어 상호 수용되지 않는 사회다.
이런 세상이라면 개인이든 조직이든 종국에는 모든 선택이 중단되고 말 것이다.어떤 의사(意思)개진이나 정보도 허망한 것이기때문에 진정한 결정이란게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부질없는 가상을 더이상 계속할 필요도 없다.진실성은 인간사회의 필수요건이다.사람들간에 기만(欺瞞)과 불신이 팽배하면 그 사회는 붕괴된다.더구나 그들이 정치 지도세력일 경우는 파급영향이 최악으로 치닫는다.
정치지도자가 무엇인가.한마디로 백성이 원하는 바를 정책으로 끌어올려주는 사람들이다.이들의 기능과 역할은 그래서 민주사회의에센스다.이것이 기만과 불신이라는 세균으로 썩어들어가면 그 사회는 급속히 곪아 문드러지고 말 것이다.
우리는 요새 아침에 눈뜨면서부터 잠자리에 들때까지 언론에서 신물이 나게 정치지도자들간의 불신행태를 목격해야 하는 곤욕을 겪고 있다.김영삼(金泳三)총재세력과 김종필(金鍾泌)대표간에 벌어지고 있는 민자당의 난파운항,이기택(李基澤)대표 와 김대중(金大中)亞-太평화재단이사장 세력사이에서 파생되고 있는 민주당의내홍(內訌)은 보기 흉한 상황으로 접어든지 오래다.
백성들의 복리나 정책과는 관계없이 진행되고 있는 이같은 정치세력간의 갈등은 상대의 말과 행동을 서로 기만이라고 의심하고 있는데서 비롯되고 있다.불행한 점은 이러한 의심들이 상당한 근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모든 선택은 상황에 대한 산정(算定)을 기초로 한다.
그 판정은 흔히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정보를 바탕으로 한다.이 과정에 어느 일방이 상대방의 기만을 파악하거나 의심하게되면 진정한 의사교환은 정지하고 기존 관계는 금가고 말게 된다.
92년 민자당대통령후보 경선때 金泳三-金鍾泌협조관계가 맺어진후 YS는「JP중심의 단결」을 당에 주문해왔다.그것은 YS가 지난 연말『당의 활성화를 위해 전당대회를 열겠다』고 입을 떼고「당의 세계화」를 주문할 때까지 계속돼왔다.그의 발언을 기점으로해 당내 민주계는 JP퇴진론의 목청을 높여왔다.이 과정에서 JP퇴진을 주장하고 나섰다는 이유로 최형우(崔炯佑)前내무장관은YS에게 크게 야단을 맞았다는 얘기도 나돌았다.
그러나 최근 YS는 JP를 청와대로 불러 당개혁과 세계화를 위한 2선퇴진을 통보했다는 것이다.결과적으로 JP쪽에서 볼때 YS세력은 JP에 대해 2중모션을 취한 것이다.
모순적이고 모호한 언동은 JP도 매한가지다.79년 金泳三 당시 신민당(新民黨)총재의 의원직과 총재직을 박탈하는 과정에서 여당책임자로 있던 인물이 이제와서 그 피해자의 정치적 동지로 탈바꿈한 것도 아이러니지만 그와 자신의 관계를「주 군(主君)과신하」로 호칭하거나「대붕(大鵬)과 연작(燕雀)」으로 비유하며 충성을 과시하던 金대표가 퇴진요구에 대해서는 선문답(禪問答)같은 수사(修辭)를 동원하며 반발해온 것도 괴이하다.
12.12기소가 실현되지 않으면 의원직을 사퇴하겠다는 식언(食言)에 이어 이번에는 金大中씨가 자신의 면담제의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대표직 사퇴등 중대결단을 내리겠다」고 엄포를 연발하고 있는 李민주당대표나,대선(大選)패배후 정계은퇴 를 선언했으면서도 당내 동교동계를 통해 정치력을 행사해온 金이사장 언행의2중성도 모두 실망스럽다.
과거엔 이들 기성 정치인들에 대해 백성들의 순박한 존경심이 두터웠던게 사실이다.그러나 요새 계속되고 있는 상호 정치적 기만과 불신은 스스로의 관(棺)뚜껑에 못질을 하는 결과를 빚는 것같아 안타깝다.
***政治냉소주의 우려 사람이 하는 일에 어떠한 형태의 기만도 일절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무리다.특히 대중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이뤄지는 소위「고매한 허위」는 일종의 정치관행이기도 했다.그러나 정치의 본분과 역할까지 망각한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줄기차게 정파간 이해(利害)에만 지나치게집착하는 저열한 언행들은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백성들의 냉소만확대시킬 뿐이다.다음 세대의 정치와 새 기수(旗手)들을 위해서라도 더이상의 분탕질들을 마감하라.
〈편집국장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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