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김종필 집중분석-YS와 관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우리 둘 사이의 우정과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 JP(金鍾泌민자당대표)는 YS(金泳三대통령)와 밀월관계에 있을 때 둘사이를 이렇게 말했다.신민주공화당과 통일민주당의 총재이던 두사람이 89년12월 3당합당을 위한 의견조율을 마치고 나오면서였다. 그러나 두사람의 관계가 JP의 말대로 늘「우정과 소신」의 관계였느냐하면 그것만은 아니었다.오히려「반목과 불신」으로 정치사의 얼룩을 반영하기도 했다.
두사람의 인연은 중앙정보부장이던 JP가 YS를 한남동 안가(安家)로 부른 6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민주공화당 사전 창당을 주도하던 JP가 전도양양하던 민주당 소장파의원 YS를 영입하려 한 것이다.그러나 JP의 회유시도는 YS가 『각자의 갈 길이 있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아 실패했다.
그후 두사람은 집권여당의 2인자와 소장파 야당의원으로 서로 반대편에서 각자의 길을 걸었다.그럼에도 JP는 유신 말기인 79년10월 국회에서 신민당 총재이던 YS를 제명 처분했을 때는혼자서 반대표를 던졌다고 한다.
이어 10.26으로 유신이 막을 내리고 「서울의 봄」이 찾아왔을 때 두사람은 민주공화당과 신민당을 대표해 대권 경쟁에 몰입했다.그러나 신군부가 등장,두사람을 모두 정치규제로 묶어버렸다. 87년 6.29선언으로 대통령직선제가 부활되자 두사람은 다시 통일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 후보로 대선에서 격돌했다.당시 1盧3金이 경쟁하는 상황에서 JP는 막판에 가서 YS를 밀어주기로 했다.그러나 「도고온천회동」에 그가 나타나지 않 음으로써둘의 연합은 무산됐다.YS쪽에서는 이 일에 대해 지금도 앙금이남아 있다는 지적이다.
다음해 4.26총선후 여소야대(與小野大)상황에서 3당합당 논의가 시작됐다.두사람은 다시 우정의 관계로 접어들며 89년10월「소신과 우정」의 골프회동을 가졌다.이는 다음해 1월22일 합당으로 이어졌다.두사람은 민자당 대표최고위원과 최고위원으로 한 배를 타게됐다.
그러나「내각제 각서 파동」을 겪으며「반목과 불신」을 표출했다.YS가 마산행을 결행하자 JP는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두사람이 반목과 불신을 극복한 것은 92년4월8일이다.YS와 이종찬(李鍾贊)의원간에 대통령후보 경선 소용돌이가 일자 JP는 우여곡절 끝에 하얏트호텔의 극비회동에서 YS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이른바「4.8밀약」으로 이는 오늘날 YS의 JP에 대한 정치적 빚이 되고 있다.
두 사람은 최근까지 매주 청와대 회동을 하고 있다.JP는 두사람의 관계에 대해 멀어지고 있다는 추측이 나올 때마다『모르는소리』라며 일축해 왔다.
3金시대를 청산하려는 YS의 「소신」이 JP의「우정」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관심이다.
〈金基奉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