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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신화…한국인의 신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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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런 때가 있었다. 국가가 각 개인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정해주던 시절 말이다. 조선시대는 '군사부일체'가 있었다면, '그때 그 시절'이라고 했던 때에도 '국민교육헌장'이 있었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존재의 이유를 알렸다면, '잘 살아 보세'는 삶의 목표였다. 이것에 동참할 수 없었던 사람은 '오라는 데도 없고, 갈 데도 없는' 심정으로 '죽기 살기 식'으로 살아야 했다. 절박함이 삶의 진실이었고 그것을 인간미와 의리라는 코드로 미화했다. 한국 사회가 만든 현대판 신화이자 숨겨져 있었던 우리의 삶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각자 원하는 대로 살아라'는 메시지처럼 아무도 내가 해야 할 일과 삶의 목표를 주지 않는다. 심리적 혼란과 불안은 당연하다. 드라마 '대장금'의 한상궁이나 무덤 속에 있는 옛 대통령에게서 오늘의 지도자 모델을 찾는 것은 또 다른 절박함의 표현일지 모른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일부러 찾은 어두컴컴한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의 눈에 이 같은 허망함과 절박함이 느껴졌다면 필자의 과도한 해석일까.

영화 '실미도'가 잘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1천만명이 관람했다는 사실에서는 이 영화가 혹시 과거의 '집단적 광기'를 오늘날에 재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어떤 불안 같은 것이 느껴진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일이 국가의 부름에 따라 선택된 일로 꾸며진 것이야 그렇다고 하자. 일부 상투적이고 과장된 대사마저 절실함의 표현이라고 하자. 하지만 이 영화가 만들어내는 감동은 이것 이상이 있다.

영화 '실미도'는 우리가 막연하게 기대하고, 또 친숙하게 경험하는 지도자와 '쫄따구'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검은 선글라스에서 연상되는 강력한 군화발의 지도자는 잊어버린 옛 대통령의 형상이다. '각자가 원하는 것을 찾아라'는 요즘의 메시지는 너무 힘들게 느껴진다. 따라서 누군가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내가 그 수단이 될 수 있었던 시대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삶의 분명한 목표는 누군가 믿고 신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절박한 심리의 반영이다.

반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박중사는 어느 순간에 자기는 살겠다고 나를 버릴지도 모르는 내 상사의 모습이다. 실미도의 훈련병에게는 김일성의 목을 따야 하는 목표가 '주어'졌다. 이들 모두도 낙오되지 않고 살아 남아야 하는 분명한 목표가 있다. 그 목표가 나의 삶에서 무엇인지 모른다. 하지만 조장과 쫄따구라는 동료가 있었다.

특수 공작원의 훈련을 다룬 영화 '실미도'가 이처럼 많은 관객을 끌어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이 같은 한국인들의 선택과 인간적 아픔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의 변화에 따른 역할의 반전은 불합리한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낸다. 이 과정에서 살아 남기 위해 합리적.이성적이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과거에는 매우 중요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인의 감성 코드를 부활시켰다. 그것이 바로 '의리'라는 이상한 단어다.

'우리가 함께 하면 고통스러운 길도 갈 만하다' '한번 쫄따구면 영원한 쫄따구다' 등과 같은 표현은 '의리'의 전형적 표현이다. 국가나 지도자가 우리를 책임지지 못할 때, 우리가 살아 남을 수 있는 방법은 의리를 찾는 것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은 삶의 희망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것이었다. 최소한 죽더라도 국립묘지에 남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기대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이름을 쓰는 그 순간의 절실함으로 공유된다. 이는 결국 '쉬리'와 '친구', 그리고 '살인의 추억'에서 지속적으로 확인된 한국적 신화와 결합한 이미지다. '집단적 광기'라 할 만큼 한국인들이 이 영화에 몰려가는 것이 우려스러운 것은 바로 '국가' '지도자' '의리'라는 한국인들의 퇴행적 코드에 관람객들도 영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다.

황상민 연세대 교수.심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