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사후의북한을가다>3.전압낮아 촛불같은 전기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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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늘 배고픔에서 벗어나지 못해「먹는 이야기」가 대화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북한사람들이지만 집안은 잘 정돈돼 있었고 온돌방은 항상 따뜻했다.
부엌문을 현관으로 사용하는 우리나라의 시골 토담집과 다름없었으며 찬장과 가마솥 뚜껑이 반들반들 윤이 나고 있었다.
부엌 아궁이 위에 크고작은 검은색 무쇠솥 3개가 나란히 자리해 재료만 있다면 언제든지 조리할 준비가 돼있는듯 보였다.
찬장에는 냄비.주전자.숟가락등이 정돈된채 진열장(쇼윈도처럼)역할을 하고 있었다.
큰방 하나를 둘로 나눠 아이들과 부모가 하나씩 쓰는 것이 보통이었다.장롱에는 철지난 남루한 옷들이 걸려있고 이불장도 우리나라처럼 차곡차곡 이불들을 쌓아놓은 그 위에 베개를 올려놓았다. 여러 모양의 문양이 그려진 벽지로 천장까지 도배한 방,벽에는 가족사진 대신 김일성 독사진과 그들 부자가 함께 서있는 사진이 예외없이 걸려있고 장롱문에는 화집에서 뜯어낸 풍경사진이나배우사진들이 붙어있어 우리들과 다름없는 정서를 엿 볼 수 있었다. 평상복이 죽 걸려있는 벽걸이는 수를 놓은 예쁜 대형 보를쳐 단정해 보였다.니스를 칠한 장판을 땜질한 것이나 벽과 바닥사이를 종이띠로 막아 연기새는 것을 막은 것들이 우리 옛살림살이와 흡사했다.
일반 토담집이나 아파트 할 것 없이 부엌 아궁이를 통해 석탄이나 땔감 나무를 지펴 방을 따뜻하게 했다.솜이 귀해 대신 무엇을 넣었는지 이불이 너무 무거워 그 무게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였다.
전압이 낮아 백열등은 20W정도의 촉광이어서 촛불을 켠듯한 침침한 분위기인데다 가끔씩 이웃에서 몰래 전기곤로나 전기다리미를 사용하는 듯 갑자기 어둑해지는 현상도 있었다.일본 조총련 가족을 둔 북송교포출신이나 미국으로부터 송금받는 가정,중국 조선족 친지를 둔 집등이 몰래 구입한 전열기구를 쓰기 때문이란다. 이들 세그룹의「특수층」은 가재도구 뿐만 아니라 식생활도 큰차이를 보여 재미교포 친지를 둔 가정의 경우 과거에는 월남가족으로 낙인찍혀 기를 못편 반동그룹으로 분류됐음에도 지금은 오히려 큰소리치고 있다는 것이다.경■에 따라선 거액의 뇌물을 바치고 이른바 북한사람들이「꽃도시」로 부르는「드림 랜드」평양으로 이주하는 가정도 있다.
학교.직장에서 돌아온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김정일 찬양노래를 들으면서『「낙원」의 행복감을 누린다』는 북한주민들.늘 전쟁연습에 길들여진 이들의「행복」을 옥죄는 일이 가끔씩 생기는데 오전3시쯤 사이렌 소리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시멘트 부대 종이로 창문을 가리거나 소등한후 외지에서 온 손님과 아이들을 두고 어른들은 어디론가 행군해 간다.그러나김일성이 죽고 미국과의 접촉소식이 전해지면서 공습훈련도 시들해져 공포분위기였던 과거와는 판이하게 아침운동 기분으로 느림보 행군이 되고 만다고 했다.
평양에서 본「꽃도시」주부들도 그랬지만 내지의 일반 주부들도 오전5시30분쯤 기상해 밥을 짓는데 석탄불을 피우거나 기름곤로를 사용해 무려 2시간이 걸렸다.
강냉이를 뜸이 들게 익히는데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만 기름곤로의 경우 심지를 너무 낮춰 그렇다는게 그집 주부의 설명이다.
석탄불은 옛날 학교교실 난로불을 피워본 우리나라 기성세대들은기억하겠지만 불씨를 지피는데 긴긴 시간이 걸렸다.
성냥도 귀해 성냥개비를 소중하게 다루고 있었다.
곤로는 석유 대신 경유를 넣어 그을음이 심했고 냄새 또한 대단했다. 경유도 물론 뜨락또르(트랙터)에서 조금씩 빼낸 것이다.강냉이 밥과 김치.토장국을 차려온 시간은 오전 7시25분.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 몇술 뜨다 고스란히 남기자 그집 주부는 식사를 권하기는커녕 오히려 반기는 눈치를 하며 가져갔다.
점심 안먹기로,하루 두끼생활이 계속된 주부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행동이리라.
저녁은 기자부부(?)가 장에서 구입한 돼지고기 2㎏으로 국을끓여 온가족이 잔치기분이었다.
그것도 돼지 죽을 끓이는 큰 가마솥에다 얼마나 물을 많이 넣었는지 아마 한달은 족히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아이들을 학교보낸 부모들은 갈 곳이 없다.
농한기인 겨울이라 남편은 집에서 주체사상을 성서처럼 들여다보고,아내는 직장인 공장이 문을 닫아 할 일이 없었다.
유류난으로 공장을 돌릴 수 없거니와 일감이 없어 휴업상태가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을 안하면「노임」(봉급)은 3분의1 수준인 17원정도만 주기 때문에 차마 볼 수 없는 지경에서 연명하는 상태.
그래서 북한주민들보다 방문자들이 더 많이 울게 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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