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49. ‘가을’과 ‘석류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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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하와이에서 녹음, 발매된 필자의 초기 가야금 작품 ‘숲’ ‘가을’ ‘석류집’이 수록된 음반.

서울 삼청동에 살던 1960년대 초 어느 나른한 가을 오후였다. 우리 집에는 TV가 없었다. 무심코 라디오를 틀었더니 흘러나온 말. “다음은 맥도웰의 ‘숲에서의 스케치’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막 ‘숲’이라는 가야금곡을 작곡했던 나는 귀가 쫑긋했다. 미국 작곡가는 숲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서양의 숲과 동양의 숲은 어떻게 다를까. 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음악에 집중했다.

맥도웰(1860~1908)의 숲은 정말 깨끗하고 단순했다. 간단하면서도 쉬운 곡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정겹게 느껴졌다. 처음 알게 된 작곡가였는데도 그의 생각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숲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걸어갈 때 나와는 관계없이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며 공중에서 곡선을 그리고 나무 열매가 툭 떨어지는 순간, 그 순간이 그대로 묻어 나와 너무나 놀랐다. 피아노의 선율이 쭉 진행되는 도중에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처럼 건반을 누르는 소리가 삽입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이 피아노곡에서 가야금곡의 작곡 아이디어를 얻었다. 아름다운 가야금 선율이 흐르고 있을 때 낮은 음역에서 열매가 툭 떨어지는 소리를 내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숲을 걸어가고 있을 때 나뭇잎이 하늘에서 빙빙 돌다가 떨어지면 열매도 따라서 낙하하고…. 그리고 또 다른 나뭇잎과 열매가 떨어진다. 이 곡이 내 두 번째 가야금 곡인 ‘가을’의 마지막 장이 됐다. ‘가을’은 3장으로 이루어지는데 가장 뒷장부터 쓰기 시작한 것이다. 1장은 말할 수 없이 맑고 파랗던 당시 서울 하늘을 그렸고 2장은 가을에 내리는 가냘픈 빗소리를 그린 것이다. 이 곡은 80년 언론 통폐합 전까지 동아방송의 새벽 시그널 음악으로 쓰였다.

이 곡을 작곡하고 나서 64년 하와이 동서문화센터로부터 초청장을 받았다. 작곡을 시작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았고 작품도 세 곡뿐인데 참 부끄럽다’는 것이 첫 느낌이었다. 그래서 한 곡을 더 구상한 것이 ‘석류집’이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서울 계동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집이 있었다.

그 집은 바깥에서 담 너머로 보면 2층 양옥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오래된 한국식 대문이 있었다. 시커멓고 위압적인 큰 대문이었다. 그 틈에다 눈을 대고 바라다보면 큰 길이 양옥 옆으로 쭉 나서 오른쪽으로 꼬부라졌다. 그리고는 숲에 가려있어 더는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 집에 대해 항상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한 아이가 “그 집에는 석류나무가 있다더라”고 말을 전했을 때 호기심은 곧 환상으로 바뀌었다.

그림으로는 자주 봤지만 실제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석류나무는 나에게 신비로운 어떤 세계를 상징했다. 그래서 이 곡은 신비로운 선율로 시작해 다이내믹하게 전개된 후 명상적인 고요한 선율로 끝난다. 이처럼 작곡을 시작하던 초기에 나는 주변에서 받은 인상을 소재로 곡을 썼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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