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일로 신뢰받는 內閣되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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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3일 마침내 뚜껑이 열린 정부개편의 내용은 한마디로 비교적무난한 실무인사(人事)라는 느낌이다.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첫조각(組閣)때와 같은 깜짝 놀랄 의외의 발탁이나 뜻밖의 기용이라 할만한 사람은 극소수고,각계에서 그런대로 건실하게 또는 무난하게 일해온 인물들이 대부분이다.이런 점은 의외성.충격성이 크던 金대통령의 지금까지 인사 스타일이 집권중반기 팀을 짜는 이번 인사에서는 많이 바뀌었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번 개편을 앞두고는 특정지역이나 계파(系派)에 치우치지 말고 「일」중심의 인사를 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는데 이번인사는 나름대로 이런 여론을 반영하려 한 흔적이 보인다.가령 민주계(民主系)인사들을 대부분 후퇴시키고 민정계 (民正系)의원3명을 입각시킨 것이나,더이상의 가신(家臣)중용현상이 안보이는것이 그런 예(例)다.
그리고 교수 출신 4명이 포진했던 외교.안보팀을 직업외교관과관료출신 등으로 물갈이한 것이 눈에 띄는데 이것도 그동안 보여온 정책 혼선을 피하고 실무중심으로 정책 추진을 해나가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청와대는 이번 인사의 기준으로 세계화추진.실무능력.애국심.청렴등을 내세웠지만 새 팀이 과연 세계화 추진에 적합한지,실제 일을 얼마나 잘 할지 등에 관해서는 두고 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번 인사를 그런대로 전문성.실무를 중시한 고심(苦心)의 산물(産物)로 평가하면서도 솔직히 말해 국민이 주목하거나기대할만한 이미지.개성은 느끼기 어렵다.결국 새 팀은 앞으로 일을 통해 국민에게 능력을 입증하고 이미지를 형 성해 나갈 수밖에 없다.지금 나라 안팎의 환경,산적한 국가적 과제를 생각하거나 金정부 자신의 임기관리를 생각할 때 새 내각의 짐은 무겁고 앞길은 험난하다.밖으로는 국경없는 무한경쟁에 이겨나가야 하고,과거와 판이해진 대북(對北)관계에 서 통일을 준비.추진해야한다.안으로는 잇따른 대형사건에서 보듯 난마(亂麻)처럼 얽힌 내정(內政) 개혁이 시급하다.
이런 어려운 과제들을 추진해 나가자면 정부의 지난 1년10개월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과거에 부족했던 점과 잘못을 살펴 그런 일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 성공적 업무추진의 첫걸음이 된다고 본다.
그동안 널리 지적돼온 정부의 문제점의 하나는 상층부의 관료 장악력 부족이라는 현상이었다.정책목표는 그럴듯하게 설정하고서도행정력을 그 방향으로 조직.동원하는데는 늘 미흡했다.1년10개월 내내 복지부동(伏地不動)이란 말이 사라지지 않고 공직사회가상.하 따로 노는 현상이 지속됐다.강한 장악력으로 공무원들을 신명나게,사명감을 갖고 뛰도록 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덧붙여 대통령이하 장.차관들이 일선과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어느 부처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행정체제를 갖추도록 권고하고 싶다.일선에서는 세금을 도둑질하고 다리 붕괴를방치하는데도 고위층은 다 모르고 있었던 실정 아닌가.
또하나의 문제는 정부의 조정력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단순업무의 처리는 잘하지만 두개 이상 기관이 얽힌 복합성업무는 몇달씩표류하기 일쑤였는데,이런 리더십 부재(不在)현상이 더이상 계속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달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세금도둑.다리붕괴.가스폭발 등 무슨 일이 터져도 고위직(高位職)에서 책임지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정치적.도의적 책임에 무감각한듯한 이런 풍토가 지속돼서는 국민의 신 뢰를 받기 어렵다. 우리는 이번 내각은 장수(長壽)내각이 되길 바란다.잦은 교체로는 일이 안된다.그러나 불행히도 짧은 재임기간에라도 큰 잘못이 드러나거나 정치.도의적 책임을 질 일이 있으면 물러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이런 유감스런 일이 없게 하자 면 정부 스스로도 강조하듯 요직(要職)에 있는 사람들이 프로근성(根性)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자기 소관은 철저히 꿰고 있어야 하며,정책 추진에도 프로다운 배짱과 고집이 있어야 한다.청와대눈치나 살펴서는 안된다.이제부터는 정부 안에 서 직언(直言)도하고 활발한 토론도 벌이는 새로운 기풍이 조성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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