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선민기자의가정만세] 대화로 부부 간 ‘연말정산’ 어때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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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결혼한 남자라면 한 해에 세 번가량 마법에 걸린다. 결혼기념일과 아내의 생일, 그리고 요맘때다. 특별한 행사와 선물을 기대하는 아내들의 반짝이는 눈빛을 떠올리며, 남편들은 뒤늦게 외국어능력시험이라도 치르는 심정이다. 다른 두 가지에 비해 성탄절 전날은 이렇게 말하며 요행을 기대해 볼 수도 있다. “길 막히는데 집에서 먹지, 뭘 외식을 해?” 근사한 식당으로 향하는 꽉 막힌 도로와 보채는 아이들 사이에서 악몽에 시달렸던 몇 번의 기억을 떠올리며, 아내들은 대개 수긍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선방했다며 안도하긴 이르다. 12월의 마지막 날이 남아 있다. 10월의 마지막 밤은 노래방에서 떠나보낼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12월의 마지막 밤은 노래방으론 어림없다. 한 해의 마지막이라는 그놈의 상징성 때문이다. 1999년 12월 31일 본지는 1면에서 ‘오늘 저녁 식탁에 촛불을 켜자’는 제안을 했었다. 일렁이는 촛불을 바라보며 가족과 함께 한 해를 돌아보고 다가올 또 한 해를 설계해 보자는 내용이었다. 거창한 이벤트와 선물은 당장은 달콤하나, 결국 다음달 카드 청구서가 날아올 즈음 부부싸움의 싱싱한 씨앗으로 둔갑할 터다. 그보다는 차분히 고개를 맞대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라는 취지였다.

올해, 비슷한 제안을 하고 싶다. 촛불을 켜든 켜지 않든, 부부끼리도 ‘연말정산’을 해보면 어떨까. 회사원들의 연말정산 개념은 내야 하는 액수보다 많이 낸 근로소득세를 증빙서류를 갖춰 신고한 후 돌려받는 것이다. 분명 집집마다 부부끼리 곰곰이 되새겨보면 서로 좀 더 많이 희생하고 봉사한 부분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이런 거다. “한 해 동안 쓴 가계부를 정리하는데, 1년 동안 내 자신을 위해 돈을 쓴 게 스타킹 몇 켤레 산 것밖에 없더라. 괜히 눈물이 났다.”(아내) “아이를 봐주신다는 이유만으로, 장모님이 아무리 까탈을 부려도 간·쓸개 다 빼놓고 헤헤거렸다.”(남편)

억울한 부분을 소명하는 기회도 가져야 한다. “쥐꼬리만큼 주는 용돈을 아껴서 모기눈물만큼도 안 되는 비자금을 만들었다가 발각돼 전액 빼앗겼다. 억울하다.”(남편) “애들은 사춘기라고 방문 걸어잠그고, 남편은 ‘제2의 사춘기’라고 밖으로 나돌기에 나도 술 좀 마셨다. 그게 어때서?”(아내) 물론 잘잘못을 가리자는 자리가 아니므로 지나친 자기합리화와 억지, 신세 한탄 등은 금물이다.

이렇게 한바탕 정리하고 나서는 서로 더 희생하고 봉사했다고 느끼는 만큼 돌려주자. 꼭 금전적인 보상일 필요는 없다. 이런 대화를 나눴다는 것만으로도 일단 가슴 속 섭섭함이 한결 풀리는 느낌일 테니 말이다. “한 해 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 이런 한마디면 된다. 어쩌면 우리는 이 한마디를 듣지 못해 근사한 식당을 예약하고 평소 씀씀이를 한참 벗어난 선물을 주고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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