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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비서실>207.盧씨,군부내 5共청산 단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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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백담사에 유폐됐지만 전두환(全斗煥)전대통령은 여전히 89년 정국의 핵이었다.당연히 그의 백일기도는 산사생활의 적응수단인 동시에 나름대로 정국을 유리하게 끌기위한 장외정치의 일환이었다.그는 백일기도로 참회의 명분과 국민적 동정심을 얻는 한편 보다 적극적으로는 6共 청와대를 직접 겨냥해「폭탄선언」이라는 원거리 폭격을 가하기도 했다.
일단 유배생활을 시작하자마자 全전대통령은 눈물 많은 일부 여론을 업기 시작했다.특히 2월6일부터 시작된 백일기도 소식은 불자들의 동정심을 자아내 지방의 보살들이 단체로 백담사를 찾아가 全전대통령을 위한 예불을 드리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정국은 全전대통령의 기대,6共 청와대의 약속과는반대로 백담사를 압박해왔다.백담사행을 설득할 당시 6共 청와대는『2~3개월만 떠나 계시면 모두 해결하겠다』고 장담하곤 했었다.이를 선의로 해석하자면 6共측은 대통령의 對 국민 호소로 여론을 진정시키고,개각과 검찰의 사법처리 종결로 분위기를 일신한뒤 야당을 설득해 국회특위를 해산하고 나면 全전대통령을 하산시킬 수 있으리라 전망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지나친 낙관이었다.
백담사의 추위와 달리 세간에는 청문회 열기가 좀처럼 식을줄 몰랐고,마침내 야당의 3金씨(金大中평민당.金泳三민주당.金鍾泌공화당 총재)는 89년 1월24일 회동에서 全전대통령의 국회증언을 요구키로 합의 했다.「5共 핵심6인 사법처리」도 함께 합의됐다.(핵심 6인은 광주문제와 연루된 鄭鎬溶 당시 특전사령관,李熺性 당시 계엄사령관,정치자금과 관련된 李源祚의원,부정선거와관련된 安武赫 당시 안기부장,일해재단비리등과 연관된 張世東전안기부 장,그리고 언론통폐합등과 관련된 許文道전문공장관이다).
이후 정국전개는 한결같이 全전대통령으로 하여금 협박용으로 간직해온 폭탄선언의 사용을 재촉하는 것들이었다.야당은 청문회를 계속하고 특위해산에 반대하는등 5共문제를 놓지않으려 했다.盧대통령은 3월20일 적극적인 정국돌파수인 중간평가를 유보한다고 선언해버렸다.全전대통령측은 중간평가 성공으로 여권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할 경우 하산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믿고있던 중이었기에 실망스러웠다.
바로 다음날 육사 졸업식장에서 민병돈(閔丙敦)육사교장이 6共의 북방정책을「해괴한 일」이라고 비판하고 대통령에게 경례도 안하는 돌출행동이 일어났다.1주일뒤인 3월28일 盧대통령은 이를계기로 全전대통령이 퇴임직전 다져놓았던 군인사체 계를 완전히 뒤집는 군인사를 단행했다.
이를 이해하려면 그때까지의 군부 사정을 개략적이나마 살필 필요가 있다.알려졌다시피 당시 盧대통령의 군내 기반은「하나회 보스 全斗煥」의 테두리내에 머무르고 있었다.특히 盧泰愚 당선자시절 민주화합추진위원회(민화위)에서 광주사태를「민주 화운동」으로성격규정한데서부터 시작해 북방정책까지 6共의 주요정책은 군내 강경파들의 노골적인 반발을 사고 있었다.그래서 盧대통령은 全전대통령이 대통령당선자인 자신을 무시하고 짜놓은 군부를 마음같이한꺼번에 흐트러뜨릴 수 없었다.
盧대통령은 全전대통령이 구축해둔 군인맥에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취임 4개월만인 88년6월 全斗煥맨이었던 박희도(朴熙道)육군참모총장을 먼저 바꾼다.임기 6개월을 남겨두고 물러난 朴총장의 후임은 盧대통령의 경북고후배인 이종구(李鍾九) 대장.얼마뒤盧대통령이 9공수여단장 시절 참모로 데리고 있었던 이진삼(李鎭三)중장을 3군단장에서 육군참모차장으로 포진시키고 9사단장 시절 참모였던 이문석(李文錫)중장을 특전사령관에 임명해 가까이에두는 후속인사를 했다.盧대통령의 주 요 군경력인 9여단장과 9사단장 시절 참모들이 중용되기 시작함에 따라「9.9인맥」이라는별칭이 붙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全전대통령이「하나회」라는사조직을 통해 군부를 지배했다면,盧대통령은 보다 범위가 좁은「9.9인맥」을 통해 군부를 장악했던 것.「9.9인맥」은「하나회」라는 사조직속의 사조직,다시말해 全斗煥의 사조직속에 포함돼있던 盧泰愚의 사조직이랄 수 있다.
***私조직속 私조직 1단계 조치를 마친 盧대통령은 다시 5개월을 기다리는 신중함을 보여 全전대통령을 백담사로 보낸 직후권력의 핵에 보다 접근해있는 보안사령관을 경질한다.全전대통령이퇴임직전 임명했던 최평욱(崔枰旭)중장을 교육사령관으로 사실상 좌천시 키고 그 자리에 역시 9사단장 시절 부하였던 조남풍(趙南豊)소장을 앉혔던 것이다.
그후 다시 본격적인 軍재편의 때를 기다리던 盧대통령이 마침 閔교장의 돌출발언 사건을 계기로 삼은 것이다.인사의 핵심 내용은 이미 보안사령관에서 밀려나 있던 최평욱교육사령관을 아예 예편시켜 버리고,또다른 全斗煥맨으로 친위쿠데타설이 끊이지 않았던김진영(金振永)수방사령관을 후임 교육사령관으로 좌천시킨 것이었다. 특히 하나회의 중심세력인 육사17기중에서도 군내 리더격인金사령관은 5.6共관계의 바로미터로 인식될 정도로 주목받던 인물.일례로 그가 90년12월 대장으로 승진해 한미연합사부사령관에 임명되자 이는 곧「6共의 5共에 대한 화해제스처 」로 해석되기도 했다.그는 결국 6共말기인 91년12월 육군참모총장이라는 정상에 올랐는데,당시 그는 취임축하연에서 한 지기(知己)에게『야,불가능한 일이 이뤄졌다』고 속삭였다고 한다.金총장 스스로가 盧泰愚정부하에서 육군참모총장이 되리 라 기대하지 않았을 정도였다는 얘기다.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은 盧대통령이 심중에 두고있던 참모총장후보 1순위 이문석대장(육사17기)이 인사를 앞두고 암수술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李대장은 다행히 경과가 좋아 참모총장 대신 6共말 총무처장관을 지냈다.閔교장 발언사건 으로 촉발된 본격 물갈이에서 육군수뇌부를 차지한 세력은 역시 9.9인맥.수방사령관 자리는 9사단 참모장출신인 구창회(具昌會)중장이 차지했고,육사교장에는 같은 9사단 연대장출신인 이필섭(李弼燮)중장이 취임했다.
이와함께 盧대통령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은 보안사령관이던 趙南豊소장을 중장으로 승진시키고,참모차장으로 발탁했던 李鎭三중장을 대장으로 승진시켜 전방을 지키는 1군 사령관으로 배치한 점이다.보안사령관의 승진으로 군기를 확실히 장 악하고 막강한 실병력을 지휘하는 군사령관에 가장 믿을만한 심복을 배치함으로써 군장악을 일단락지은 셈이었다.盧대통령은 가장 원초적인 힘의 중심인 군부를 확실히 장악함으로써 또다른 5共청산을 매듭지은 셈이기도 했다.
***보이지않는 청산 이는 보이지않는 군부내의 5共청산으로 백담사를 불편하게 했다.
이와함께 백담사를 더욱 자극한 것은 全전대통령이 퇴임직전 대장으로 승진시켜 합참의장에 앉혔던 최세창(崔世昌)대장의 백담사방문좌절사건이었다.역시 盧대통령에 의해 1년여 만에 예편당한 그가 백담사로 찾아왔다가 보안사 요원들의 제지를 받고 4시간이나 승강이를 벌이다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이 사건은 두가지 면에서 全전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렸다.하나는 崔장군이 전화로 방문을 통보했는데 보안사 요원들이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도청당한다」는 확증으로 불쾌감을 더했다.다른 하나는 현역 군장성들의 백담사출입을 금지한 상태에서 전역한 군 후배까지 못만나게 한다는데 대한 인간적 섭섭함이었다.
곧이어 5월 임시국회가 시작되면서는 全전대통령의 국회증언이 기정사실처럼 언론에 오르내렸으며,19일에 열린 여야중진회의는 全전대통령의 국회출석 증언에 합의해버렸다.물론 이 과정에서 국회증언에 반대해 온 백담사의 의지는 전혀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여기에 인간적으로 恨을 더한 것은 백담사행 이후 당시까지 盧대통령으로부터 아무런 안부 편지나 전화연락도 없었다는 점이다.백담사에 오기전까지만 해도 무슨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인사차 연락을 해오던「친구」였는데 달라진 것이다.당시 全전대통령과 가까운 金모목사가『대통령이 못오면 김옥숙(金玉淑)여사라도 한번 찾아와야…』라는 얘기를 하자 全전대통령이『그건 인간된 도리를 아는 사람들간의 얘기』라는 냉소적 반응을 보인 것도 이러한 정서적 반감을 말해준다.
金목사는 이같은 심상찮은 분위기를 여권에 비교적 정확히 전달했다.그 결과로 나타난 것은 성환옥(成煥玉)경호실차장의 방문이었다.백담사행 이후 약 반년만에 처음으로 盧대통령이 全전대통령을 위로하는 내용의 친서도 휴대했다.백담사 경비를 청와대경호실이 담당했기에 경호실차장을 보낸 것이다.成차장은 백담사의 숙원이었던「전기가설」희망을 감안해선지 소형발전기도 하나 들고왔다.
그러나 이같은 유화제스처는 이미 늦은 감이 있었다.백담사측은이미 폭탄선언을 장전해 두었기 때문이다.장전해두었던 폭탄은 5월20일 모 월간지 6월호에서 터졌다.
***“6.29는 全씨작품” 폭탄은 6.29선언의 진상과 정치자금 두가지였다.6共의 성전(聖典)과 같은 6.29선언이 盧대통령 작품이 아니라 全전대통령이 연출한대로 盧대통령이 연기한것에 불과하다는 주장과 정치자금 5백50억원을 盧대통령에게 주었다는 주장이었 다.
이는 물론 백담사가 지니고 있던 폭탄의 일부였지만 6共 청와대를 직접 겨냥한 서늘한 비수임이 분명했다.
청와대는 다음날『무책임한 주장으로 불신을 조장하는 것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나 누구를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않는다』며「근거없는 주장」으로 몰아붙였다.「진상(眞相)」은「이설(異說)」이라고 불렸지만 이때부터 6.29는 성전으로서의 성 (聖)스러움을 잃어갔다.
백담사측 관계자 R씨는『6.29의 진상이 폭로되자 백담사에 대한 청와대 쪽의 태도가 확 바뀌기 시작했다고 느껴지더군요.이전까지 백담사쪽을 쳐다보지도 않던 청와대가 우리쪽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고 봅니다.당시 백담사에서는 이같은 태도변화를 일제시대의 일본제국주의 통치와 비교해 농담하곤 했습니다.
폭탄선언 이전까지를 6共의 백담사에 대한 무단통치기라고 한다면이후는 유화정책기라는 얘기죠』라고 기억했다.백담사 진영이 체감하기에 폭탄선언은 적지않은 효력을 발휘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폭탄선언도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吳炳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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