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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수화, 세계로 통하는 손짓이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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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청각 장애 학생들을 위해 영어수화 책을 만든 구진모(16·<左>)군이 21일 오후 서울농학교에서 이 학교 학생 임대영(16)군과 만나 수화로 "잘 지냈느냐"고 안부를 묻고 있다.

영어 수화와 한국어 수화는 단어의 뜻을 표현하는 손짓이 다르다. 구진모(16)군의 동생 승현(15)양이 ''사랑'' ''엄마'' ''이름''이라는 단어를 한국어 수화와 영어 수화 그림으로 그려 보내왔다. 승현양은 올 8월 오빠와 함께 만든 영어 수화 교재에도 단어에 어울리는 일러스트를 그려넣어 쉽고 재미있는 영어 수화책을 만들었다.

"이야, 너 키 진짜 많이 컸다. 영어 수화도 나보다 더 잘하는 거 아니야?"(구진모.16)

"에이, 아직은 아니야. 네가 만들어준 책으로 더 열심히 공부할래."(임대영.16)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신교동 국립서울농학교의 한 교실에서 지난 여름방학 이후 6개월 만에 만난 두 친구 대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얼싸안고 한바탕 시끄럽게 소란을 피울 법한 나이인데도 그들의 대화에는 소리가 없다. 그들을 친구로 이어준 끈은 세상에서 가장 조용하고 아름다운 말, 수화(手話)였다.

청각장애 2급인 임대영(서울농학교 고등부 1학년)군을 찾은 이는 구진모군. 미국 매사추세츠주 명문 보딩스쿨(기숙학교) 필립스 앤도버에 다니는 구군이 겨울방학을 맞아 한국에 오자마자 농학교에 들렀다.

올 3월부터 서울농학교에서는 중.고등부 학생 130여 명에게 영어 수화를 가르치고 있다. 국내 초.중.고교에서 영어 수화를 가르치는 학교는 서울농학교가 유일하다. 수화가 필요한 청각.언어 장애인 20만5000여 명의 대부분은 필담이 아니면 영어로 대화를 나눌 수 없다. 일반인으로 치면 영문 독해는 하지만 회화는 한마디도 못하는 격이다.

구군은 서울농학교 학생들에게 '영어'로 하는 수화의 길을 처음 터줬다. 1년 전 미국 유학 중에 구한 영어 수화 교재를 이 학교에 전달해 물꼬를 텄고, 올 8월엔 직접 교재를 만들어 기증했다. "세계화 시대에 일반인들에게 영어 회화 능력이 꼭 필요하듯, 청각장애인들도 영어 수화를 하면 꿈을 펼칠 기회가 훨씬 많아질 것"이라는 바람 때문이었다.

구군은 열 살 때 선천성 청각장애 판정을 받았다. 오른쪽 귀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일반 학교인 서울 여의도중학교를 다녔다. 수화에 눈을 뜬 것은 중학 3학년 때인 2년 전이다. 구군은 "꾸밈없는 농학교 친구들과 속 깊은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한국어 수화를 배웠다"고 말했다.

미국에 가서는 정규 보딩스쿨 외에 농학교에 다니며 영어 수화를 배웠다. 단어별로 영어 수화 손짓을 외우기만 하면 어순이나 문법은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미국 청각장애인들과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대학으로 유명한 미 걀롯대 인터넷 도서관을 뒤져가며 학습 자료를 모았다. 농학교 교사들은 구군이 보내준 미국의 영어 수화 교재를 번역해 급한 대로 보조교재를 만들었다.

영어를 가르치는 최선영 교사는 "영어 수화는 우리도 처음이어서 배우면서 가르친다"며 "손짓이 한국어 수화와 다르기 때문에 헷갈려 하는 학생들이 많아 큰 욕심은 부리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처음 영어 수화를 배워본 임대영군도 "아직 모르는 게 훨씬 많지만 재밌다"고 말했다.

올해 8월 방학을 맞아 한국에 들어온 구군은 농학교에 선물을 한 가지 더 안겨줬다. 직접 영어 수화 교재를 만든 것이다. 1000권을 인쇄해 농학교에 기증했다. 미국 교재의 저작권 문제가 항상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교재 인쇄 비용은 구군의 소개로 농학교와 자매결연한 여의도고 학부모 봉사회가 바자를 열어 마련했다.

새 교재는 한국 학생들이 영어 수화를 쉽고 재미있게 배울 수 있게 신경을 썼다. 서울예원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한 여동생 승현(15)양에게 단어에 어울리는 일러스트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영어 수화 동작을 3, 4단계로 구분해 찍은 사진을 실어 학생들이 사진을 보고 따라할 수 있게 했다. 꼬박 한 달을 매달려 책을 완성했다. 요즘은 영어 단어 1000개를 담은 두 번째 교재를 준비 중이다. 이번에는 연상법을 활용한 암기 팁도 책에 넣을 예정이다.

구군은 "청각장애인들과 일반인 사이를 잇는 다리가 되고 싶다"며 "앞으로 특정 분야의 전문용어를 모아서 영어 수화 교재로 만드는 작업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글.사진=박수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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