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국민의 머슴이 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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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이 경이로운 지지에 먼저 고개를 숙여야 한다. 국민이 던진 한 표 한 표에는 지난 5년간의 나라 걱정과 울분, 눈물과 한숨이 녹아 있음을 온몸으로 느껴야 한다. 자신이 정말 당선될 자격이 있었던 사람인가를 이 순간 겸허하게 돌아봐야 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번민하며 방황했던 수많은 국민들…. 그들이 왜 자신에게 표를 던졌는가. 이명박이 예뻐서, 잘나서가 아니었다. 이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다는 처연한 심정으로 투표장에 들어갔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결단이 모여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런 국민의 마음을 읽지 못하면, 아니 당장은 읽었으되 권력에 취해 곧 망각한다면 그는 지금 대통령보다 더 심각한 버림을 받게 될 것이다.

그 많은 결점과 석연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왜 국민은 그를 선택했을까. 한마디로 일하는 대통령이 되라는 메시지였다. 청와대에서 떵떵거리며 군림하라고, 자기 편끼리 희희낙락하라고 뽑은 것이 아니다. 하나도 일, 둘도 일이다. 국민들은 지난 정권에, 아니 지난 10년에 너무 실망했다. 이념에, 공리공론에, 말싸움에, 철없음에, 천박함에 절망할 대로 절망했다. 나라의 앞날은 험난한데 정치꾼들에게 휘둘려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 공통의 생각이었다. 정권교체를 바란 것이다. 그래서 때가 좀 묻었어도, 도덕심에 만족을 못해도, 일할 사람을 뽑자는 것이었다.

당선자가 지금 당장 착수해야 할 것은 이런 국민의 여망을 수렴하는 일이다. 이를 바탕으로 ‘이명박 정부’의 청사진을 취임 전까지 제시해야 한다. 새 정부의 최우선 과제가 무엇이 돼야 하는지 찾기는 어렵지 않다. 왜 1년 넘게 흔들리지 않고 그를 1위 후보로 지지해 줬는지, 왜 그토록 정권교체를 열망했는지 들여다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국민은 ‘꿈과 희망을 잃어버린 세월’을 되찾으라고 절박한 심정으로 외치고 있다. 침체된 경제를 되살려 청년 실업과 양극화를 극복하고 우리 사회를 선진 사회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망가진 교육을 다시 살려내야 한다고 절규하고 있다. 내 집을 갖고 싶어 하는 젊은 부부들의 소박한 꿈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념이 아니라 실용적 남북관계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 주변국과도 잘 지내야 하지만 무엇보다 전통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돼야 한다. 세계화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효율적인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이런 것이 시대정신이다.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이 권태감에 젖어 있던 프랑스를 변화시키듯 우리도 잃었던 활력을 빨리 회복해야 한다. 더 이상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이런 일을 하자면 국민의 확고한 동의와 지지가 필요하다. 그러자면 당선자의 마음가짐부터 달라져야 한다. 국민의 목마름을 정말 안다면 국민 앞에서 한없이 낮아지고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지배하고 군림하려 들 경우 지지를 거둬들이는 것은 한순간이다. 국민은 대통령이란 직위를 이명박 개인의 명예욕과 권력욕을 충족시키라고 맡긴 게 아니다. 섬기고 봉사하는 청지기 역할에 충실하라는 요구인 것이다. 일하는 ‘머슴’이 되라는 게 국민의 지상명령이다.

당선자가 이런 섬기는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시금석은 바로 인사다. 대통령직 인수위부터 시작해 새 정부의 각료와 청와대 비서진 인선을 취임 전에 발표해야 한다. 그 인사가 한나라당 후보 경선과 대선 과정에 참여했던 공신들의 ‘자리 나눠먹기’가 돼서는 결코 안 된다. 널리 천하의 인재를 구하지 않으면 국민의 비판과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된다. 국민이 노무현 정부를 그토록 싫어하게 된 데에는 ‘코드 인사’ ‘회전문 인사’가 큰 몫 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나라당 의원들도 정신 차려야 한다. 그들은 지난 10년간 야당이었다. 그만큼 권력에 굶주렸기에 이제부터 이권을 챙기고 인사에 개입하는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이를 경계하지 않으면 집권 초기부터 민심을 잃게 된다.

대운하 공약은 대선 내내 격렬한 선거 쟁점이었다. 그것은 당선자의 주장처럼 국가 발전의 동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임기 중 당선자를 끊임없이 괴롭힐 만성적 논쟁거리가 될 수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초 ‘수도 이전’ 공약을 강행하려다 급격히 지지를 상실했던 경험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당선자는 “청계천 복원 사업 시 주변 상인과 노점상을 설득하기 위해 수천 번 만났다”고 했다. 대운하 문제도 그렇게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선결과제다. 국민이 원하지 않는데 당선자 혼자서 옳다고 밀어붙이면 독선이 된다.

당선자에게는 ‘이명박 특검’이 목에 가시 같을 것이다. 당선자의 말처럼 BBK 의혹에 한 점 거리낄 게 없다면 억울하고 화가 날 수도 있다. 그러나 국민들의 의심이 풀리지 않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특검에 지나치게 얽매일 이유도 없다. 자칫 취임까지 남은 67일을 허송세월하게 된다. 국민은 이 기간에 당선자가 어떻게 하는지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그래서 ‘일 잘하는 대통령이 될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서면 국민이 나서서라도 당선자를 지켜줄 것이다. 그러나 당선자 시절을 우왕좌왕하며 보낸다면 국민은 정치적 공세에 귀를 기울이게 될지 모른다.

이제 3개월 반 뒤면 총선이 있다. 당선자가 임기 내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총선에서도 승리해야 한다. 그러나 총선은 이명박 특검 등으로 인해 그런 성적을 내는 데 순탄치 않을 것이다. 여기에 국민이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 특검에 매달리다간 취임 초를 허송할 수가 있고 그렇다고 의문을 방치할 수도 없다. 새 대통령이 오만해지는 것도 막아야 한다. 그러자니 새 대통령과의 협력과 견제를 어떻게 조화롭게 하느냐가 관건이다. 당선자가 오만을 보인다면 총선이 기다리고 있다. 그때 그에 합당한 징계를 표로써 해주면 된다. 반면 특검을 새 대통령 발목 잡기와 포퓰리즘으로 활용하려는 세력에 대해서는 그만큼 응징해 주면 된다.

그러나 당선자가 정말로 이 나라를 위해 헌신할 자세를 보이면 언론이나 국민, 아니 정치권까지도 새 대통령에게 협력해야 한다. 새 대통령이 일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취임 후 6개월, 혹은 1년 소위 허니문 기간 동안은 기다려 줄 필요가 있다. 미국도 새 대통령에 대해 이 정도의 관용은 지켜 준다. 이명박 특검도 그런 점에서 절제가 있어야 한다.

지금 태안반도 일대에는 매일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수십만 명의 자원봉사자가 인간 띠를 형성해 기름에 더럽혀진 바위를 하나하나 손으로 닦고 있다. 우리 국민은 이런 저력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다. 우리 국민은 고비고비 지혜롭게 현명한 판단을 해 왔다. 그것이 이 나라를 세계 11위 국가로 만들었다. 이런 지혜로운 국민, 언제든지 사회공동체에 헌신할 준비가 돼 있는 국민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리더가 할 일이다. 그것은 섬기는 리더십에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