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정의 영화VS영화] 시나리오 작가 리처드 커티스 vs 노라 애프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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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아리 시나리오 작가 최민우씨는 누가 뭐래도 위대한 로맨틱 코미디 한편을 쓰고 싶었다. "로맨틱 코미디라니, 뻔한 해피 엔딩의 사랑 타령? 그거 하려고 고생하면서 작가하냐?"라는 주위의 빈정거림에 맞서다 보면 최민우씨는 '로맨틱 코미디를 위한 변명'이라는 책 한권 정도는 써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뻔하다니. 사랑이 뻔하다고? 로맨스의 완성보다 아름다운 팬터지가 있단 말인가? 뻔하다는 말에는 많은 사람이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절실한 바람이란 뜻이 있지 않은가? 사랑 타령? 이보쇼, 로맨틱 코미디는 우리 일상에 가장 가깝고 리얼한 감정으로 만들어진 장르라고. 드라마를 이끌어가느라 세세하게 우리 사는 모습을 뒤돌아볼 틈 없는 다른 장르에 비해 장애물을 극복하는 남녀의 사랑이라는 이야기의 변주 안에서 우리의 소심한 일상을 되돌아 보게 만드는 거지.

'러브 액츄얼리'같은 리처드 커티스의 영화를 봐. 그는 언제나 일상의 작은 경험들에서 다양한 층위의 페이소스를 이끌어내지 않나. 그럼으로써 절묘하게 우리의 삶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만들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 나오는 노라 애프런의 대사들을 보라고. 그저 뿌연 안개처럼 자리잡고 있는 사소한 일상의 진실들에 대해 '발견'하고 인식하게 만드는 그 예리함 말이야. 그런 게 로맨틱 코미디의 미덕이지.

그렇다. 최민우씨는 리처드 커티스 같은, 노라 애프런 같은 그런 로맨틱 코미디를 쓰고 싶었다. 그가 크리스마스에 이어 밸런타인 데이에도 극장에 달려가 '러브 액츄얼리'를 본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단 한명의 예외도 없이 커플로만 가득찬 극장에서 옆자리를 비워둔 쓸쓸함 정도야 그에게는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는 공항에 마중나온 모든 사람이 커다란 미소를 지으며 포옹하는 첫 장면부터 가슴이 벅찼다. 그는 사랑이 세상 어느 가치보다도 소중하다고 외치는 감독의 당당함에 압도당한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최민우씨. 자신이 요즘 집필 중인 시나리오 '서울에 사는 30대 남녀의 사랑 이야기'의 파일을 연다. 일단 그는 주인공들을 커티스처럼 '첫 눈에 사랑에 빠졌지만 왠지 사랑을 말할 수 없는'상황으로 몰고 갈 것인가, 아니면 노라 애프런처럼 '사랑에 빠질 것같지 않은 두 남녀가 티격태격하면서 조금씩 가까워지는'상황으로 만들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커티스가 각본을 쓴 '러브 액츄얼리'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노팅힐'에서 휴 그랜트는 모두 상대 여자와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다. 그 사랑을 가로 막는 것은 주인공의 유난히 머뭇거리는 성격이거나('네번의 결혼식과…'), 혹은 로맨스에 빠지기엔 거창한 한 나라의 총리라는 직업이거나('러브 액츄얼리'), 혹은 여자는 할리우드 대스타인데 자신은 작은 서점의 직원이라거나('노팅힐') 하는 조건들이다. 이러한 '장애'는 주인공이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사랑을 선언하겠다는 결단을 내림으로써 극복된다.

노라 애프런은 좀 다르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때'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유브 갓 메일'의 남녀들은 매력적인 캐릭터지만 이들은 여러 이유로 가까워지기 힘든 사람들이다. 이들은 서로의 숨겨진 매력을 발견한 뒤 그가 운명적인 내 사람이었음을 깨닫는 과정을 밟는다.

그 주인공의 사랑을 돕는 조연들을 어떻게 배치시킬까도 문제다. 커티스식으로 한다면 조연들은 '네번의 결혼식과…'의 말 못하는 동생이나 '노팅힐'의 룸메이트처럼 주인공과 친밀한 감정을 교류하며 주인공 못지 않은 러브 스토리를 각자 진행시키는 한편 주인공의 사랑 만들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러브 액츄얼리'에서는 조연들 하나 하나가 아예 주인공이다. 조연들은 독립적이면서 주인공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로맨스와는 다른 진한 애정을 느끼게 된다. 애프런 식으로 한다면 두 남녀 주인공에 좀더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이들의 티격태격 애정싸움은 두 사람의 오랜 대화 장면을 요구하며 조연들은 여기에 조언을 하는 정도다. 대신 두 남녀의 대화는 두 남녀 사이에 실제로 문제가 되는, 그들이 고민하고 회의하는 아주 세밀한 '연애의 세계'를 끌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최민우씨의 더 큰 고민은 이들이 보여줬던,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삶에 대한 세밀한 인식들을 담아내는 것이다. 이를테면 '유브 갓 메일'에서 톰 행크스가 커피를 사면서 "스타벅스는 결단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심지어 자아를 발견하게 하도록 만드는 곳이다. 커피 하나를 사는데 무려 여섯 가지의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라는 내레이션이나, '러브 액츄얼리'의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사랑한다'고 말한다"라는 식의 사랑의 소중함을 설파하는 그런 절묘한 한 줄을 뽑아내야 할 텐데.

욕심은 늘어나고 머리 속만 복잡해진 최민우씨. 노트북 화면 속의 커서는 쉴 새 없이 깜빡이고 있는데 그의 손가락은 움직일 줄 모른다. 역시 대작가가 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왜 남들 영화에선 뻔히 보이는데 내게선 그런 작품이 안 나오는 걸까. 언제나 같은 고민에 빠지는 최씨는 오늘도 그냥 별 소득없이 밤을 새울 것 같다.

이윤정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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