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남기자의영화?영화!] ‘나는 전설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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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지난주 개봉한 윌 스미스 주연의 영화 ‘나는 전설이다(사진)’는 리처드 매드슨의 동명 소설이 원작입니다. 소설을 읽고 보니 대단한 작가더군요. 스필버그 감독의 데뷔작으로 유명한 ‘결투’의 원작과 국내에서도 인기를 끈 TV시리즈 ‘환상특급’의 에피소드도 여러 편 썼습니다. 미국 공포소설가 스티븐 킹이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가로 꼽기도 했습니다.

소설 ‘나는 전설이다’는 1954년, 그러니까 반세기도 전에 발표됐습니다. 치명적인 바이러스 때문에 대부분의 인간이 사망하고, 살아남았다 해도 흡혈귀·좀비 같은 이상생물체가 돼 버린 시대에 유일하게 인간의 모습을 잃지 않은 남자가 주인공이지요.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그 생물들은 밤에만 활동하면서 이 남자를 공격하려 합니다. 남자는 낮 시간을 틈타 생존에 필요한 활동을 하고, 바이러스의 특성도 연구합니다.

영화를 먼저, 소설을 나중에 봤는데, 놀랍더군요. 결말이 180도 판이합니다. 소설과 영화 모두 막바지에 이 남자가 인류의 ‘전설’이 된 이유가 나오는데, 그 이유가 완전히 다릅니다. 소설의 기조가 음울하고 비관적이라면, 영화는 할리우드 특유의 해피엔딩에 종교적 구원의 색채를 더하지요.

전반적 분위기 역시 사뭇 다릅니다. 소설의 주인공이 혼자 살아남은 자의 공포로 전전긍긍하며 알코올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반면, 영화의 주인공은 깍쟁이다 싶을 만큼 자기관리에 철저합니다. 러닝머신에서 달리면서 체력을 키우고, 지켜보는 사람이 없어도 대여점 비디오를 반납하는 것까지 규칙적 생활을 유지합니다.

영화의 시각적인 표현 역시 맥을 같이합니다. 황폐화된 뉴욕 맨해튼 중심가를 주인공이 자동차로 달리는 전반부 장면이 대표적이지요. 말이 황폐화지, 타임스 스퀘어에 초원이 형성되고 사슴이 뛰어다닙니다. 삭막한 도시가 다시 자연과 어우러진 듯 푸근하게 느껴지더군요. 더구나 주인공의 차는 섹시한 스포츠카입니다. 하기야, 쓰는 사람이 임자인 상황이죠. 주인공은 골프채를 들고 맨해튼의 마천루를 향해 티샷을 날리는 호사까지 누립니다. 소설과 달리 충직한 개도 한 마리 있어서, 이 녀석이 건강하기만 하면 지금 같은 생활을 계속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소설과 영화가 이렇게 다르다 보니, 왜 굳이 이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는지 궁금할 정도입니다(소설은 64, 71년에도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공포가 넘실대는 소설과 달리 영화는 고독, 가끔은 꽤나 럭셔리한 맛이 나는 고독을 내세웁니다. 영화를 만든 이들은 반세기 전의 소설독자와 요즘 영화 관객의 취향이 달라졌다고 본 것일까요. 아니면 전형적인 좀비영화에서 벗어나려다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영화를 내놓은 것일까요.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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