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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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대학생이 됐기 때문에 누리는 특권 중의 하나는 늦잠을 자도 된다는 사실이었다.시간표를 짤 때 잘만 하면 9시부터 시작하는1교시 수업을 피할 수 있는 거였다.물론 피할 수 없는 필수과목도 있었는데,나 같으면 금요일 1교시의 문학■ 론 시간이 그랬다. 금요일만은 다시 고등학생이 된 기분으로 잠자리를 박차고일어나 부랴부랴 아침도 거른 채 지옥철을 타고 학교로 달려가는거였다.개론 정도면 대개 젊은 시간강사가 맡게 마련이었지만,이상하게도 이 시간만은 정년이 거의 다됐을 것 같게 고참 교수가담당이었다.나이 들면 새벽잠이 없어진다는 소리가 맞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여간 깐깐한 교수였다.일반적으로는 대학교수가 중고교의 선생님과 다른 점은 강의시간에 떠들지 않는 한 학생에게 잔소리를 안한다는 점이었다.
그게 자유와 자율을 준다는 점이었다.그 점에서는 사실 학원강사들과 대학교수가 비슷했다.
하지만 문학개론의 노교수는 그렇지 않았다.교수가 학원 강사처럼 구는 것은 교육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는 지론을 가진 분이셨다.학생들에게 자유와 자율을 준다는 명목으로 많은 교수들이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게 노교수의 주장이셨다.문학 개론 시간에는 우선 출석점수가 70점이었다.게다가 얼마나 철저하게 출석을확인하는지 대리출석같은 건 생각도 못할 정도였다.어떤 때는 출석만 확인하다가 강의 시간의 70%쯤을 까먹기도 하는 거였다.
하여간 노교수가 출석점검을 마치고 지루한 강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쯤이면 강의실의 여기저기에서는 각각 모자라는 아침잠을 보충하기 위한 명상들이 시작되는 거였다.바로 그런 시점이었다.교단 옆으로 난 하나밖에 없는 출입문이 빠끔히 열리고 소라가 고개를 들이민 거였다.
노교수가 안경너머로 소라를 쏘아보며 왜 지각했는지를 물었다.
소라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면서 「죄송합니다」라고 그러고는 자리로 들어서려고 했다.
노교수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밀며 소라를 막았다.눈부시게아름다운 아침 열시쯤이었다.
이제 강의실에서 아침잠을 보충하려는 놈들은 아무도 없었다.샴푸선전에 나오는 것 같은 긴 생머리에 미니스커트,거기에 무릎을덮는 부츠…게다가 몸을 비비 꼬는 소라….
『사정이 있었으면 말해봐.구두로 지각계를 접수해주겠다 이거야.』 소라가 입을 한일자로 다부지게 한번 다물었다가 말하기 시작했다. 『…다른 날처럼 버스를 탔거든요.물론 만원버스니까 숨도 제대로 못쉬면서 손잡이 하나에 매달려 있었어요.근데 가끔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요,이상한 손길이 느껴지는 거예요.등 뒤에서 점점 밑으로 내려가는 거예요.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요.끔찍했다니까요.
근데 내가 자리를 옮기면 그 손도 자꾸만 따라 오는 거예요.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버스에서 내렸어요.내리면서 살짝 보니까반 대머리의 아저씨 하나가 음흉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어요.끔찍했다니까요.그래서 다음 버스를 타려구 지갑을 찾았더니요,등에 메고 있었던 가방이 열려 있고 지갑이 온데간데 없는 거였어요.
그래서 두 정류장을 열심히 걸어온다는 게 이제야 도착한 거예요.죄송합니다.교수님.』 노교수가 말을 끝낸 소라를 십초쯤 응시하다가 들어가도 좋다는 손짓을 해보였다.소라가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노교수가 주제를 바꿔서 문학에 있어서의 성적 감수성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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