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소나타 시리즈 시작 백건우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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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밤 서울 예술의전당. 피아니스트 백건우(61)씨가 무대 뒤에서 활짝 웃었다. 베토벤 소나타 전곡(32곡)을 8일간 연주하는 장정(長程)의 첫날을 성공적으로 마친 만족감이었다. 백씨는 이날 베토벤이 젊은 시절 작곡한 소나타를 중심으로 다섯 곡을 연주했다. 그는 “베토벤에 딱 맞는 피아노를 골랐다”며 즐거워했다. 예술의전당에서 준비한 피아노 7대를 당일 오전부터 하나하나 쳐보며 고른 피아노였다.

 반응도 좋았다. 객석을 꽉 채운 청중들은 예순을 넘긴 피아니스트의 도전을 응원했고, 연주가 끝나자 수 차례 커튼콜로 백씨를 불러냈다. 무리하지 않고 차근차근 풀어낸 베토벤 소나타가 와 닿았기 때문이다.

 첫 연주곡은 ‘소나타 19번’. 베토벤 스스로 ‘쉬운 소나타’라고 이름 붙인 곡이다. 구조가 단순해 어린이도 많이 도전하는 작품이다. 베토벤이 25~28세 때 작곡했으나 20여 년 후 출판돼 작품번호가 늦은 편이다. 백씨는 ‘19번’을 서정적으로 풀어냈다. 베토벤의 격동적인 삶을 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특히 페달을 많이 쓰고 선율을 강조해 울림 있는 음악을 만들었다.

 사실 백씨가 인정받는 것은 화려한 기교와 완벽한 손놀림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늘 “자신의 생각과 마음이 담긴 연주여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이번에도 그는 베토벤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줬다. 빠르게 돌아가는 손가락으로 한치의 빈틈 없이 정확하게 치는 차원이 아니었다. 간혹 음이 빠지거나 소리가 잘못 나기도 했다. 하지만 작곡가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백씨의 왼손과 오른손이 대화를 나눴고, 피아노 소리 또한 인간의 목소리에 가깝게 표현됐다.

 백씨는 예의 두툼한 손을 건반에 툭툭 떨어뜨리며 욕심 없는 소리를 냈다. 흔히 전곡을 연주하는 경우 연주자의 스타일을 강조하기 위해 음악을 과장하기 쉽지만, 이날 백씨는 기본에 충실했다. 비유하자면 화장기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그는 이어 소나타 1, 20, 25, 3번을 연주했다. 공연장을 나서던 한 청중은 "영혼을 사로잡는 연주”라고 일행에게 속삭였다.

백씨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피아노에 대해 “아직 소리가 터지지 않았더라”고 말했다. 베토벤 후기의 폭발적 음악을 담아내는 데 역부족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9일에도 두 차례에 걸쳐 소나타 10, 2, 15, 18번 등 모두 8곡을 연주했다. 8일 연주곡보다 베토벤이 2~3년 정도 후에 작곡한 곡으로, 연주 또한 전날보다 좀더 뚜렷해지고 힘이 실렸다. 연주는 14일까지 매일 계속된다.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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