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학 작가회의 20년 만에 이름 바꿔 '한국작가회의' 재출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2면

한국을 대표하는 진보적 문인단체인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이름에서 '민족'이란 단어를 뺐다. 출범 20년 만의 일이다.

민족문학작가회의(이사장 정희성)는 8일 정기총회에서 단체 명칭을 '한국작가회의'로 바꾸는 내용의 정관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서울 사간동 출판문화회관에서 열린 총회에는 백낙청.신경림.현기영.도정일.이시영씨 등 회원 150여 명이 모였으며, 정관 개정안은 참석 회원의 만장일치 결의로 확정됐다.

이로써 자유실천문인협의회(1974년)에서 민족문학작가회의(87년)로 이어지는 진보적 문인단체의 계보는 '한국작가회의'의 새 시대를 맞게 됐다.

한국작가회의는 이날 발표한 '출범 선언문'에서 "아시아.아프리카 작가들과의 교류가 시작됐고, 이주 노동자, 결혼이민 여성이 우리의 가족이 돼 가는 현실 속에서 우리의 문학적 관심이 민족 내부의 문제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명칭 변경의 이유를 들었다. 하지만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정신과 역사를 온전히 계승한다"며 "민족문학의 정신을 포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시대에 맞게 응전하는 것"이라고 못 박았다.

단체는 1월 '민족'이란 단어를 떼는 내용의 단체 명칭 변경안을 통과시키려고 했으나 변경안을 제대로 통보받지 못했다는 일부 회원의 반발로 무산된 바 있다. 이후 단체는 '명칭변경소위원회'를 구성해 회원 설문조사 등 의견수렴 절차를 밟아 이날 총회를 준비했다. 백낙청 상임고문은 1월 이후 여러 자리에서 "단체 명칭에서 '민족문학(National Literature)'이란 표현 때문에 해외에서 '극우단체'란 오해를 샀으며, 우리 사회가 다문화.다민족 사회로 빠르게 변화하는 현실에서 민족문학은 더 이상 생산적인 구호가 아니다"고 강조해 왔다.

명칭 변경의 필요성은 또 있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문인단체임에도 민족이란 수식어로 인해 소수의 좌파 모임이란 인식이 팽배했던 게 사실이다. 따라서 단체는 70~80년대 민족문학을 주창하며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원로 문인부터 최근 등장한 젊은 작가까지 문학계 전반을 포괄하는 명칭이 필요했다. 출범 선언문에서 "한국작가회의로 이름을 바꾸는 것은 우리가 명실상부하게 한국의 문학을 대표하는 문인들이 모여 있는 단체이기 때문"이라고 명시한 것도 이런 이유였다.

김형수 사무총장은 "유신시대 때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기 위해 '자유실천'이란 표현을 이름에 붙였고 6월항쟁 이후엔 통일운동에 집중하자는 차원에서 민족문학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며 "시대 변화에 따라 단체 이름도 자연스레 변화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명칭 개정에 대해 문학평론가 도정일(경희대 명예교수)씨는 "식민지 시대나 독재 시대 때는 민족이 큰 역할을 했고 또 분단 극복을 주제로 할 때는 민족이 여전히 중요한 소재지만, 현재는 우리 문학의 관심을 민족과 분단에만 국한할 수 없을 정도로 세계가 변화하고 있다"며 "한 나라를 대표하는 단체가 되기 위해선 보다 포괄적으로 울타리를 넓히는 명칭이 좋다"고 밝혔다.

연세대 사회학과 김호기 교수는 "민족주의를 넘어서 보편주의로 나아가는 우리 사회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 같다"는 의견을 냈다. 김 교수는 "민족주의는 자칫 민족우월주의나 폐쇄적 애국주의, 혹은 인종주의와도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감성의 최전선에 있는 작가들의 이번 결정을 긍정적으로 본다"고 평가했다.

한편 이날 총회에선 도종환(53) 시인이 차기 사무총장에 선임됐다. 현 이사장 정희성 시인은 차기 이사장이 선임될 때까지 석 달간 유임됐다.

배영대.손민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