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방송 올라탄 인터넷 포퓰리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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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의 지원사격을 받는 인터넷이 여론 형성과 대중 동원에 미치는 영향력은 막강하다. 특히 사회적 약자의 분노를 촉발할 수 있는 사건이 인터넷을 휩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를테면 정치 부패에 대한 네티즌의 분노 에너지를 극대화하는 데 성공한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이 방송의 띄워주기로 탄력을 받는다면 놀라운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인터넷과 방송의 상승작용이 낳은 정치적 파괴력은 이미 지난 대선 당시 촛불시위에서 여실히 입증되지 않았던가. 미국이란 강자의 부당함에 항의하는 약자의 분노가 인터넷 공간에서 극렬한 형태로 증폭된 뒤 시청 앞 광장에 결집돼 나타난 포퓰리즘 현상은 방송과 인터넷의 합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터넷 포퓰리즘은 정치적으로 소외된 집단이 인터넷을 매개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긍정적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시민운동 단체들은 인터넷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지지세력을 확대하거나 운동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터넷 포퓰리즘의 함정을 경계해야 한다. 유권자들의 불만과 분노를 정략적으로만 이용하는 감성정치 전문가들이 인터넷 포퓰리즘을 악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열악한 현실의 개선을 원하는 유권자들의 요구를 정책의 성과로 해결하지 못한 채 책임을 전가할 분노의 대상만을 내세운다면 유권자들은 다시 좌절을 맛보게 될 것이다. 좌절의 상처가 깊어질수록 더 큰 분노를 이끌어내는 대상을 내세우는 악순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약자의 위치에 머물러 있으면서 강자에게 분노의 화살이 꽂힐 수 있도록 해야 인터넷 여론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야당과의 갈등과 일부 신문들과의 대립에서도 자신이 희생자이며 약자임을 부각하는 전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불법 선거자금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10분의1 레토릭, 혹은 티코와 리무진의 비유를 꺼내들면서 상대적 약자의 이미지를 재생산했고 '덜 부패했음'을 은근히 과시했다. '더 부패한' 한나라당의 존재는 '덜 부패한' 열린우리당이 기댈 수 있는 확실한 언덕이 된 셈이다.

인터넷에서 약자의 분노를 동원하는 전술을 일찍부터 터득했던 시민운동 단체들은 이번 총선에서도 낙천.낙선운동 혹은 당선운동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체들마다 명분을 내세워 특정 정책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정치인들을 리스트에 포함하다 보니 선정 기준의 공정성에 관한 논란이 일고 있다. 특히 이념이 다른 운동단체들은 정반대의 선정 기준을 내세우면서 지지 여론을 획득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여러 운동단체가 공정한 경쟁을 통해 다양한 의견을 유통시킨다면 이는 매우 바람직한 현상일 것이다. 유권자들이 여러 유형의 낙천.낙선운동을 두루 살펴보면서 자신의 의사결정에 필요한 정보를 선택적으로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영방송인 KBS가 이미 낙천.낙선운동에 관한 시사토론 프로그램을 방영했으나, 盧대통령의 외곽조직인 국민참여 0415와 여권에 우호적인 총선시민연대의 대표만을 출연시켰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대통령과 여권을 지지하는 운동단체들만 띄워주거나 홍보해 준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운동단체들이 유권자들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인터넷 사이트뿐인데 이 두 단체는 방송 출연을 통해 단번에 전국의 유권자들에게 운동을 선전할 수 있는 특혜를 누렸다. 방송에 출연한 운동가들이 이끄는 인터넷 사이트는 방송이 나간 직후 방문 네티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음을 감안할 때 게임의 불공정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유권자들의 알 권리 충족을 위해서라도 낙천.낙선운동 혹은 당선운동에 참여한 여러 단체의 다양한 생각을 들어보고 이들이 적용한 상이한 선정 기준에 관해 토론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기대해 본다. 한국 사회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매체로 알려진 공영방송이 특정 세력에만 유리한 인터넷 포퓰리즘을 확산시키는 촉매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란다.

윤영철 연세대 교수.신문방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