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 타고 댄스 뮤지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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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교분(右)씨가 리허설에서 열연하고 있다. [사진=박종근 기자]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남성 무용수의 손에 이끌려 스르르 휠체어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음악에 맞춰 바닥에 앉은 채 애틋한 사랑의 표현을 주고 받던 그는 곧 상대에게 안겨 무대를 한 바퀴 빙그르 돈다. 그때 갑자기 나타난 또 다른 남성 무용수. 그를 빼앗듯이 받아 안곤 무대 뒤로 사라진다.

27일 밤 11시 서울 청담동 루멘 예술전용공간에선 댄스 뮤지컬 ‘쑈룸’의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서둘러 의상을 갈아입은 오교분(31·여)씨가 휠체어를 탄 채 다시 등장했다. 지체장애 1급인 오씨의 얼굴은 달콤한 꿈에 젖어있는 듯했다. 그가 상대 배우와 호흡을 맞춰 연기하는 장면은 많지 않지만 극의 흐름에선 중요한 인물이다.

“다른 곳은 괜찮은데 두 다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전혀 쓸 수 없었어요. 신경 손상 때문이래요. 그런데 휠체어에 갇힌 제 몸으로도 무대에서 이렇게 많은 걸 표현할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아요.”

오씨의 삶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1남2녀 중 막내이면서 유일한 장애인이었던 그는 가난 때문에 중학교도 다닐 수 없었다고 한다. 그나마 복지관 장애인 직업훈련 프로그램에서 디자인을 배운 게 다행이었다. 스무살 때 고향인 경기도 화성을 떠나 혼자 서울에 온 오씨는 낮에는 작은 의류업체에서 의상디자인을 하며 돈을 벌고 밤에는 혼자 공부했다. 그는 중·고등학교 검정시험을 통해 한국재활복지대학(애니메이션 전공)에 진학, 장학금을 받아가며 공부를 마쳤다.

오씨의 도전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오씨는 장애인 미디어센터를 다니며 성우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그에게 기회가 왔다. 올 9월 인터넷에서 루멘 판토마임댄스씨어터라는 현대무용극단이 장애인 배우를 찾는다는 공고를 발견한 것이다.

“제 휠체어를 안무에 녹여내느라 연출 선생님이 많이 고심하셨을 거예요. 절 안고 연기하는 상대 배우들한테도 미안해서 요즘 다이어트하고 있어요. 호호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원작 ‘쑈룸’은 12월 3~5일 남산 드라마센터 무대에 오른다. 이미 연극과 단편영화 등에 출연한 적이 있는 길별은(38·뇌병변장애 3급)씨를 중심으로 오씨와 여러 명의 비장애인 무용수들이 함께 무대를 꾸민다.

김정수 기자 ,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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