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25. 첫 가야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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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부산 피란 시절에 일본식 2층 집의 내 방에서 가야금을 연습하고 있는 모습.

내가 중학생 때 처음 썼던 가야금은 지금 다른 사람의 손에 있을 것 같다. 아예 없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좋은 가야금이 생겨 첫 악기는 이름 모를 사람에게 팔았다. 1950년대 가야금 교습생 중에는 상류층 주부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마 이들 가운데 한 명이 내 가야금을 샀던 것 같다.

지금은 어디로 넘겼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 첫 가야금을 얻었을 때의 감격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부산 피란 시절에 가야금을 시작한 뒤 나는 부모님에게 악기를 사 달라고 졸랐다. 16살 많은 누나에게까지 “부모님 좀 설득해 달라”며 보챌 정도였다. 중학생 아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처음엔 꿈적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서너 달이 지난 어느 날 어머니가 먼 길을 떠나려는 듯 짐을 싸고 계셨다. “부산에서는 가야금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전주가 예술을 즐기는 고장인 예향(藝鄕)이라니 거기에 가면 있지 않을까 싶다.” 전북 출신인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남기고 전주로 떠나셨다. 아마 전주에 사시던 어머니의 외사촌 동생인 이봉래 아저씨에게 미리 편지를 보내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누군가 쓰던 가야금을 아저씨가 구해 놓은 걸 알고 전주로 떠나신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오시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일주일쯤 뒤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오셨다. 가야금을 구하러 갔다가 친척들까지 만나고 온 어머니가 야속할 지경이었다. 가야금은 검정 헝겊자루에 싸여 있었다. 자루를 벗기자 머리 부분이 아주 화려한 가야금이 나타났다. 가슴이 뛰었다. 누나는 “그토록 기다리던 가야금 소리 한번 들어보자”며 내 앞에 앉았다. 당시 초보자였던 나의 가야금 소리는 형편없었을 것이다. 신통치 않은 내 연주에 실망한 누나의 표정도 기억난다.

나는 어머니가 사온 가야금을 새색시처럼 아꼈다. 첫 가야금이 너무나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나는 이 악기를 벽에 기대어 세워놓고 밤에 자다가 몇 번씩 일어나 불을 켜고 바라보고 쓰다듬기도 했다. 이렇게 훌륭한 소리를 내는 악기는 세상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나중에 보니 그 가야금은 정통으로 만든 것도 아니었고 품질도 썩 훌륭하지만은 않았다. 특히 머리 부분의 모양은 지나치게 화려했다.

당시에는 장식이 많아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보니 그 장식은 일본식의 무늬를 따른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가야금 비슷한 일본 악기가 ‘고토(箏)’다. 지금 생각하면 일제시대에 일본인이 사용하던 고토를 부셔서 가야금으로 개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장식 부분이 고토와 아주 비슷하게 생겼고 크기는 그보다도 더 작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정식으로 악기를 구하게 돼 이 가야금 역시 남에게 넘겼지만 그냥 가지고 있었으면 더 많은 추억을 떠올리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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