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BBK 침묵’은 계속될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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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 04면

노무현 대통령이 23일 오후 청와대에서 임채진 신임 검찰총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기 위해 집무실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노 대통령은 이날 오후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열린 해인사 대비로전(大毘盧殿) 낙성 대법회에 참석했다. 축사에서 노 대통령은 “마지막이 좀 편안할 것 같았는데 역시 제 팔자가 그런지 마지막에 시끄러운 문제가 좀 터져서, 우리 정책실장 사고가 나버리고, 비서관 한 사람도 사고 나고, 지금은 무슨 비자금이 나와 가지고…”라며 자신이 이른바 당선축하금을 받지 않았음을 밝혔다. 국회가 전날 ‘2002년 대선 후 당선축하금’을 수사대상에 포함시킨 삼성 비자금 특검법안을 통과시킨 데 대한 첫 공식 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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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노 대통령은 근 한 달째 정치 현안에 대해 말을 아껴왔다. 지난달 25일 청와대 참모회의에서 노 대통령이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대선 후보에 대한 ‘소극적 지지’ 의사를 밝힌 사실이 그날 청와대 브리핑을 통해 소개된 것을 끝으로 노 대통령의 발언은 이후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정치권에선 이런 노 대통령의 침묵 모드를 자연스럽게 여기는 시각이 많았다. 한 청와대 핵심 참모는 “노 대통령도 10월쯤 대선 후보들이 결정되면 현실정치에서 자신이 더 이상 주인공이 되기 어려울 것으로 내다보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신당에선 “우리(정동영 후보 측) 입장을 생각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다”(김현미 대변인)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대선 정국에서 특검법안이 전격 처리되는 의외의 상황이 노 대통령의 말문을 다시 열게 만들었다. 참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청와대는 당선축하금을 수사대상에 넣자는 한나라당 안을 “터무니없다”고 봤고, 더구나 그 같은 안이 범여권 신당의 협조로 그토록 신속하게 처리될 줄은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한 청와대 참모는 “충격이었다”고 표현했다. 노 대통령이 특검법안을 수용할지, 거부할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대선 정국에 또 다른 파란이 생길 여지가 있다.

세간에선 노 대통령이 검찰의 BBK사건 수사에 과연 어떤 입장을 보일지에 더 촉각을 곤두세운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독주가 계속되는 가운데 범여권은 절대 열세를 반전시킬 마지막 카드로 BBK사건을 지목하고 있는 상황이다. BBK사건은 대선의 모든 쟁점과 국민 관심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돼 있다. 여기엔 10년 전 기억도 작용한다.

1997년 10월 21일 김태정 검찰총장은 “신한국당의 국민회의 김대중(DJ) 총재 고발 사건 수사를 15대 대선 후로 유보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당시 대선 정국의 최대 변수였던 DJ 비자금 의혹에 대한 수사를 검찰이 유보한 것이었다. 김영삼(YS)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이것이 자신의 결정이었다고 말해왔다. “검찰총장을 직접 불러 수사를 유보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YS의 이 지시는 아무리 임기 말이라 해도 현직 대통령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절대 권력의 소유자임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2007년 11월 노 대통령의 상황은 비교할 필요가 없을 만큼 양호한 편이다. 심각한 친인척 비리를 겪지 않았고 경제지표도 나쁘지 않다. ‘노사모’로 상징되는 열성 지지층도 남아 있다. 청와대 사람들은 “노무현 정부의 임기 말엔 레임덕이 없다”고 자부해왔다. 그런 관점으로만 보면 노 대통령의 입장은 충분히 검찰 수사에 변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청와대 참모들은 한결같이 검찰 수사에 대통령이 관여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노 대통령이 재임 중 가장 분명히 했던 것 중 하나가 ‘검찰에 신세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는 검찰을 활용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고위 관계자는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 정윤재 전 비서관 수사 때 청와대가 일절 개입하지 않은 점을 사례로 들며 “청와대가 검찰에 덮으라거나 밝히라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대통령은 수사 불개입 원칙을 끝까지 지키려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검찰 수사에 간여하는 것은 노 대통령이 그동안 간직해온 자존심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것일 수 있다. 검찰을 정권의 도구로 쓰지 않는다는 것은 참여정부의 자랑거리였기 때문이다.

그렇긴 해도 청와대가 BBK사건을 긴장감을 갖고 주시하고 있다는 점은 여러 곳에서 감지된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검찰이 정치적인 의도로 수사를 덮거나 혹은 무리하게 수사를 진행하면 수사지휘권을 발동할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검찰 수사는 그런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언제든지 사용할 ‘칼’을 갖고 있다는 점과, 하지만 현재로선 그 칼을 꺼내들 이유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얘기다.

일단 어떤 형태로든 검찰 수사결과가 대선 전에 발표돼야 한다는 데 대해 청와대 관계자들은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관계자는 “어느 쪽으로든 결론이 나면 발표를 해야 하고, 결론을 내지 못했을 경우 미진한 부분에 대해 향후 어떻게 수사할 것인지를 밝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후보의 BBK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든,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든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가 대선 정국에 엄청난 소용돌이를 가져올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수사결과 발표 시점을 ‘대선 전’으로 못박아 두고 있는 것이다.

청와대 일각에선 지난 8월 한나라당 경선 일주일을 앞둔 시점에 검찰이 “이 후보의 형 이상은씨가 소유했던 도곡동 땅 지분은 제3자의 것으로 보인다”고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한 것에 대해서도 적절했다는 시각이 있다.

한 관계자는 “만약 검찰 수사가 정치적으로 흐르면 대선 후 신당 등에서 BBK 특검을 하자고 나올 가능성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검찰이 이런 청와대의 인식을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앞으로의 관건이다.

BBK사건에 대한 노 대통령의 판단이나 언급은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24일 해인사 축사에서 묘한 뉘앙스의 말을 남겼다. “특검을 하든 아니 하든 어느 쪽으로 가든 흑백을 밝히도록 돼 있다. 한국이란 나라가 어떤 절차로 가든 간에 뭘 덮어버릴 수 있는 나라가 아니며, 덮어버리고 갈 수 없고 그럴 힘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진실은 결국 밝혀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노 대통령의 심중에 어떤 전략적 고민이 담겨 있는지 점점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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