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화장터에서 산길을 내려오는데,운전석에 앉은 써니엄마가 눈을 깜빡이는게 몹시 지쳐보였다.그리고 무언가 말을 걸기에도 어색한분위기였다.
『잠깐 서 있다가 가요.아주 피곤해보이시는데….』 써니엄마가통일로 부근의 무슨 공원같은 곳에 차를 세웠다.써니엄마는 시동을 끄고 나서도 한동안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그러다가 왼팔을 핸들에 올려놓고 고개를 기울여 왼뺨을 괴고 멍한 시선으로내 쪽을 보고 있었다.그래 나도 이 젠 지쳤나봐… 써니엄마의 침묵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써니엄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젠… 더 가볼만한 데도 없게 된 거야.』 내가 창문을 조금 열고 담배를 한대 권했다.써니엄마가 고개를 들고 담배를 물었고,내가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었다.
『선희를 여기서라도 찾았다면 난 아마 통곡을 하면서 울었을 거야.그리고 우는 걸 끝내면 마음이 어지간히 후련해졌을 거야.
정말이야… 난 말이야,그렇게라도 정리를 하고 싶었다구.』 그런말을 듣고 있다 보니 나도 심사가 복잡했다.그래서 나도 에라 하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차의 히터가 꺼져서 그렇기도 했지만,정말이지 썰렁한 분위기였다.그러고 보니 정말이지 써니는 나쁜 계집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말이야… 어째야 하는 건지… 그냥….』 써니엄마의 목소리가 잠겨들고 있었다.써니엄마가 담배를 비벼끄고 갑자기 차에 시동을 걸었고,속력을 내서 통일로를 달렸다.나는 뭐라고 한마디쯤 해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할 말을 찾지 못했다.써니는 내게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니가 없었다면 난 아무데도 찾아다니지못했을 거야.더이상 방해하지 않을 게.공부 열심해 해서…알지…?』 써니엄마가 우리집 근처에 나를 내려주면서 그랬다.어쩐지 이별의 말 같아서 섭섭했지만,한편으로는 어차피 언젠가 필요한 말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는데,써니엄마가 내 손을 한번 꼬옥 쥐어주 었다.그러는 써니엄마의 눈에 물기가 보였다.어쩐지 나도 갑자기 눈물이핑 돌아서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나간 첫날,악동들과 써니의 친구들이모두 모였다.합정동 양아의 자취방에서였다.같이 사는 양아의 언니가 시골에 갔다고 했다.마석의 여관방에서 혼숙했던 팀에서 써니 하나만 빠지고 다 모인 거였다.내가 겨울방학 동안에 써니엄마와 같이 여기저기를 찾아다닌 일을 다 말해주었다.
『오월달에 어머니 날인가 어버이 날인가가 있잖아,그때까지 써니가 안나타나면 말이야,우리가 써니엄마한테 카네이션을 달아드리자구.얼마나 썰렁하겠느냐구,안그래.』 승규였다.내 말을 다 듣고 난 아이들이 한동안 조용했던 거였다.
양아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다가 말했다.
『아냐.어쩌면 말이야,이젠 우리가 써니엄마를 모른 척하구 가만히 내버려두는 게 도와드리는 건지도 몰라.우릴 보면 자꾸 써니가 생각나기만 할 거라구.달수한테도 또 보자는 인사를 안했다잖아.』 나는 죄도 없는 성냥개비만 부러뜨리면서 고개를 숙이고앉아 있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