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에서>P군에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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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P군에게.
지난 여름은 유난히 더웠네.낮이고 밤이고 가릴 것 없이 정말견디기 힘들었지.그러나 계절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야.벌써 아침 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날씨를 느낄 수 있는 결실의 계절이 되었네.누렇게 출렁이는 벼를 보면서,지난 여름 가물어서 비 오기를 기다리다 못해 태풍이 왔으면 했던 농부들의 간절한 소망이헛되지 않아 평년작은 되리라는 소식에 위안을 얻게 되었다네.
지난 추석은 자네의 도움으로 풍성한 중추가절을 보낼 수 있었지.우리뿐만 아니라 이웃집과 친척들,그리고 평소에 신세진 주위분들에게도 자네가 준 많은 밤으로 밤파티를 열었지.그러나 밤맛이상으로 내 한 쪽 가슴은 쓰리고 아팠다네.
몇 년에 걸쳐 이른 새벽부터 해가 지도록 험한 산을 개간해 밤농장을 일구어 놓은 자네의 억세고도 두터운 손,손금이 닳아 지문이 나오지 않을 정도의 손이 떠올랐네.또 밤송이 가시에 찔리고 가시가 살에 박혀 삭을 때까지 아픔을 견디는 모습,손 마디마디 피멍이 엉겨 있지만 우람하고 벽돌 같은 손은 한편 마음든든함으로 다가왔네.
그날 저녁 우리는 소주잔을 사양 않고 마셨지.술안주도 없이 우정을 마음껏 들이키면서 44년전 우리가 국민학교 다닐 때를 연상했지.나는 존경받는 국민학교 선생님이 되겠다고 했고 자네는용감한 군인이 되어 공산군을 무찔러 통일된 조국 을 만들겠다고한 기억이 새롭네.
그 후 모두가 농촌을 등진 채 날품팔이 지게를 져도 도회지로나갔는데 자네는 고집스럽게도 고향을 지켰지.
온 국민이 원하지 않음에도 어쩔 수 없이 UR는 타결되고 말았으며 UR의 파고(波高)는 벌써 우리를 집어삼킬듯이 닥치고 있다는 자네의 말에 나는 무력감과 함께 우울한 기분에 젖어드네.그러나『이 근육과 팔뚝에 힘이 남아 있는 한 어 떻게 해 볼텐데』라는 여운의 말이 귓전을 때리네.
언제나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자세로 살아 가는 자네 모습에서 위안을 삼아 왔는데….
〈五源綿業社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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