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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일파초회를 아십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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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고전 중의 고전이라는 성경도 아직까지 오역 시비에 휘말리나 보다. 나는 얼마 전까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마태복음 구절을 오역이라고 생각했다. ‘낙타’가 아니라 ‘밧줄’이 맞다는 지적을 여러 군데서 접했기 때문이다. 원전의 철자 하나를 번역자가 잘못 인식해 ‘밧줄’이 ‘낙타’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번역 분야에 해박한 신복룡 건국대 교수가 이런 주장을 폈고, 발터 크래머 등 독일 저술가 3명이 쓴 『상식의 오류사전 2』에도 밧줄을 낙타로 잘못 옮겼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며칠 전에는 번역가 이윤재씨가 신문 기고문에서 “낙타가 아니라 밧줄이라는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고 지적한 것을 보았다. 성경의 수많은 영어 버전 중 어느 것도 ‘thick rope’라고 번역하지 않았으며, 옛 이스라엘에서는 성곽 정문 외에 낙타가 간신히 들어갈 만한 작은 쪽문이 있었고 그 문을 ‘바늘귀’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옳을까.

여하튼 그래도 성경은 행복하다. ‘밧줄’과 ‘낙타’의 철자 하나 차이는커녕 아예 한글 번역이 시도조차 되지 않은 수많은 한문 고문서가 우리 주변에 산적해 있다. 성균관대 안대회(한문학) 교수에 따르면 지금부터 1세기 이전의 고전은 95% 이상이 한문이다. 질적으로도, 양으로 따져도 그렇다. 이 많은 조상들의 문화유산을 그냥 사장시킬 수는 없다. 서울대 규장각만 해도 엄청난 양의 한적(漢籍)이 후손들의 독해 작업을 기다리고 있다.

매달 마지막 일요일 오전 10시, 서울 고궁박물관 회의실에 15명의 남녀가 모인다. 오후 1시까지 함께 공부하고 점심식사를 마친 뒤 헤어진다. 모임 이름은 ‘말일파초회(末日破草會)’. 초서로 된 옛 편지(간찰)를 독해하는 모임이다. 마지막 일요일에 어렵다는 초서를 독파한다 해서 ‘말일파초’라 이름 붙였다. 1999년 봄 발족했으니까 벌써 8년이 넘었다. 이광호(연세대)·김종진(동국대) 교수와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모임의 공동대표다. 직지사 성보박물관장 흥선 스님, 박병원 우리금융지주 회장, 김경숙 조선대 교수 등 참석자들의 전공과 직업은 다양하지만 주축은 역시 저 유명한 지곡서당 출신, 한학계의 거두 임창순(1914~1999)의 제자들이다. 아모레퍼시픽의 서경배 사장이 모임을 후원하고 있다.

한자의 초서는 조선시대에도 행서(정자체를 흘려 쓴 것)와 별도로 공부했다고 한다. 한문을 좀 안다는 연구자도 초서만큼은 따로 오랜 시간을 들여 익혀야 한다. 초서 중에서도 관청 공문서 같은 것은 일정한 투식(套式)이 있기 때문에 비교적 해독하기 수월하다. 가장 어려운 것은 역시 개개인의 필법과 개성이 깃든 편지글(간찰) 해독이다. ‘말일파초회’는 바로 이 간찰 해독에 8년 넘게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추어 모임이라고? 큰 결례다. 그동안 공부한 내용을 담아 펴낸 『옛 문인들의 초서 간찰』『조선시대 간찰첩 모음』 등 두 권의 책은 초서를 공부하는 이들 사이에 이미 교과서처럼 자리잡았다. 유홍준 청장은 “우리 모임이 학계에도 자극을 주어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의 체취가 느껴지는 간찰에 더 주목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그렇더라도 개인의 소모임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 많은 한문책을 국역하려면 국가의 지원이 필수다. 다행히 민간단체이던 민족문화추진회가 공식 정부출연기관인 ‘한국고전번역원’으로 바뀌어 다음달 4일 출범식을 갖는다. 고전번역원은 오늘 오후 학술진흥재단 강당에서 ‘한국 고전번역서의 평가 방안’을 주제로 세미나도 연다.

소설가 김탁환씨는 평소 “규장각은 내 재산”이라고 말한다. 숱한 한문고전이 바로 소설의 소재이기 때문이다. 『방각본 살인사건』『열녀문의 비밀』『열하광인』 등 그의 ‘백탑파 3부작’은 규장각이 주무대다. “한문학 하는 분들이 문화 콘텐트 감각을 갖고 번역해 주면 나처럼 예술 하는 사람들은 참 고맙죠”라고 김 작가는 말한다. 한문 콘텐트들이 속속 번역돼 양지로 나오길 기원한다.

노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