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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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써니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청량리에서 시내로 나오는 사이에 거리의 가로등들이 한순간 불을 밝히기 시작하고 있었다.써니엄마는 운전하면서 간혹 내게 말을 걸고는 하였다.큰 화물트럭 하나가 차선을 무시하며 쳐들어와서 위험한 순간이 지나갔을 때에는 이렇게 말했다.
『서울에서 운전한다는 게 어쩌면 우리가 사는 거하고 똑같이 아슬아슬해.하루라도 마음놓고 편히 살지를 못하잖아.』 『그렇게아슬아슬하게 살아오셨단 말이에요?』 『정말 그랬어.선희가 크는동안에는 말이야,어느날 갑자기 선희가 사라져 버리면 어쩌나 그런 생각도 많이 했고….』 써니엄마는 차가 빨간 신호등에 걸려서 서 있다가 느닷없이 내게 엉뚱한 걸 묻기도 하였다.
『그래,달수는 그동안에 새 여자친구가 생긴 건 아니구…?』 『……….』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아니라고 말하는 게 예의인 것 같았지만 그건 또 하영이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된 때문이었다.그렇다고 하영이 이야기를 하자니,내가 써니와 관계가 있었다는 걸 다 알고 있는 써니엄마에 대한 도 리가 아닐 거였다.그런데 더 분위기가 이상해진 건 내 묵묵부답에 대해서 써니엄마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래서 결국 내 무응답이 어떤 하나의 분명한 대답처럼 돼버리고 만 거였다.
써니엄마가 십여분만에 무언가를 다시 소리내어 말한 것은 명동에 자동차를 주차시키면서 였다.
『우리 맛있는거나 먹고 가지 뭐.괜찮아…?』 근사한 양식집이었다.까만 양복에 나비넥타이를 맨 신사가 테이블을 지정해주고,써니엄마가 앉기 편하도록 의자를 뺐다가 밀어넣어 주었다.그리고촛불까지 켜주고 허리를 굽혀 인사한 다음에 사라졌다.
『이런 데 와본 것도 아주 오랜만이야.달수하고 있으니까 어쩐지 마음이 편해지는걸.여기… 괜찮지…?』 나는 그런데 가본 게처음이어서 조금은 어리둥절했기 때문에 그냥 고개만 끄떡거렸다.
써니엄마가 웃는 얼굴이 참 보기 좋았다.내가 해도 돼? 라면서,써니엄마가 내것까지 다 주문해 주었다.써니엄마는 와인도 한잔쯤은 괜찮다면서 웨이터에게 내 잔에도 와인을 따르도록 명해주었다. 『선희아빤 아주 높은 사람이었어.그러니까… 18년전에 나하고 처음 만났을 때는 그랬다는 말이야.난 그때 아직 음대를 졸업하기 전이었어.』 써니엄마가 거기까지 말하고 와인잔을 비운다음에,따라줄래? 라고 했기 때문에 내가 와인잔을 채워주었다.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어쩌면『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는 노래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그건 내가 제목은 들어봤는데 곡은 알 지 못하는 노래중의 하나였다.
『난 그때 아르바이트로 레스토랑에서 피아노 연주를 했거든.「반쥴」이라고 그땐 아주 유명한 사람들이 모이는 유명한 집이었어.거기서 그 사람을 만난 거야.선희아빠 말이야.삼십대 후반이었는데… 근사했구 또 힘도 있었어.다른 어떤 여자라 도 그 사람의 초대를 거절할 생각은 없었을 거라구.정말이야.그런 남자였단말이야.』 써니엄마는 음식에는 거의 손도 대지않고 와인만 계속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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