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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비서실>196.노태우 총선참패 삭이고패장들과만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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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6共의「소신파」로 알려진 최병렬(崔秉烈)의원은 노태우(盧泰愚)前대통령을『초인적 인내력을 가진 분』이라고 평가한다.
80년대말,90년대초 문공부장관.노동부장관을 지낸 崔의원은 그무렵 명동에 친구를 만나러갔다가 거리를 가득 차지하고 있는 노점상.포장마차를 보고 크게 놀랐다.명백한 불법영업인데도 버젓이 명동거리를 차지하고 있는 반면 세금을 내면서 합법적으로 영업하는 가게들은 불법의 서슬에「비켜달라」는 얘기도 못꺼내고 있었다.崔장관은 며칠 뒤 대통령에게「공권력을 동원해서라도 당장 법질서가 뒤바뀐 현장을 정리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盧대통령은『어차피 한번은 겪어야할 현상』이라며『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해결될 수 있다』고 반대했다.崔의원은『시간이 지나고보니 대통령의 말처럼 자연스럽게 해결이 되더라』며 盧대통령을『우리 정치발전수준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지도자』 라고 평가했다.거꾸로 말해 만약 전임자인 全전대통령이 권좌에 그대로 있었다면 민주화는 불가능했을뿐 아니라 무력에 의한 충돌,비극적 결과가 불가피했으리라는 주장이다.물론 이는 盧대통령과 6공에 대한 대표적인 극찬(極讚)중의 하나다.
어쨌든 盧전대통령의 인내력이 대단했음은 확실하다.여소야대정국은 대통령의 인내력을 끝없이 테스트했고,또 원래부터 남달랐던 대통령의 인내력을 더욱 담금질했다.
그는 집권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총선참패」라는 충격을 받고처음에는『왜 하나도 안맞는거야』(당시 여권 정보기관등 관계기관에서 한결같이「당선」이라 낙관했던 후보들이 무더기로 떨어졌다)라고 분통도 터뜨렸다.하지만 그는 곧바로 인내심 을 회복,투표다음날 아침 홍성철(洪性澈)비서실장과 최병렬정무수석이 사의를 표하자 오히려『하늘의 뜻』이라며 이들을 위로했다.
그리고 닷새후에는 선거당사자들인 민정당 지구당위원장들을 청와대로 초청,격려하는 모임을 가졌다.하지만 불편한 심기는 어쩔 수 없었던지 행사 시작 10분만에 자리를 떠버렸다.지구당위원장들을 수백명 초청한 청와대행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 이었다.
그러나 盧대통령은 다시 특유의 인내력을 발휘,그로부터 열흘후보기싫을 법도한 패장들인 원외지구당위원장들만 따로 불러 만찬을함께한다.그리고는『지난번에는 격전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가운데 여러분과 만났으나 따뜻한 위로의 말씀을 다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사과성 발언을 했다.이 자리에서 그는 야당의 바람선거를『바람이 아니라 연탄가스같이 스며들어 국민을 중독시켰다』고 비난한 뒤『과반수 의석을 못가졌다고 국정을 주도해 나가지 못할 것은 결코 없습니다』고 호언까지 했다.
그러나 盧대통령은 이로부터 불과 두달뒤 헌정사 초유의 일로 또한번의 대단한 인내력을 발휘해야만 하게된다.
총선참패후 두달이 지난 7월2일 오후 국회본회의장.
신임 대법원장으로 내정된 정기승(鄭起勝)대법원판사의 임명동의안이 표결로 처리되고 있었다.여소야대인 13대 국회 첫 표결이었다.평민.민주 양당이「여소야대의 본때를 보이겠다」는 부결의지를 확실히 하기위해 아예 투표용지를 받아든 의원들 이 기표소에들어가지도 않고 백지투표하는 방식을 택해 1백% 반대표결에 성공했다.하지만 민정당은 느긋했다.민정당 혼자서는 과반이 안되지만 이미 제4당인 공화당과「가결」에 협력하기로 막후협상을 끝내놓았기에 과반은 무난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김종필(金鍾泌)공화당총재와 鄭대법원장 내정자는 같은 충남출신으로 평소 교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었다.金총재는 표결직전 의원총회에서『나는개인적으로 鄭대법원판사의 대법원장임명동의에 찬성한다』는 말로 사실상「가결」을 지시했 던 것.
그러한 사정이 알려지면서 대법원에 있는 鄭내정자의 사무실은 이미 오전부터 하객의 축하인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표결결과 찬성표는 과반수에 7표 모자라 부결이었다.엉뚱하게도 무효표가 14표나 됐다.13대 국회에 처음 금배지를 달게된 초선의원들이 처음 해보는 표결에 기표방식을 잘 몰라 실수를 한 것으로 분석됐다.무효표는「可」라는 찬성표 시 대신「贊(찬성할 찬)」자를 써놓았거나「정기승」또는「鄭起勝」이라는 이름을 적어 사실상 찬성표임에도 불구하고 기표방법의 실수로 무효처리된 것들이었다.사실상 7표가 남아야 할 표결 결과가 어처구니없는 기표상의 실수로 7표가 모자라게 된 것이다.같은날 바로 이어 임명동의안이 여유있게 통과된 김영준(金永駿)감사원장 내정자를 만약 鄭대법관 내정자보다 먼저 표결 처리했다면 기표 실수로 인한 부결은 없었을 것이고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얘기가나올 법도 했다.
盧대통령이 진노했음은 당연하다.
가장 큰 책임은 당연히 원내사령탑인 김윤환(金潤煥)총무에게 있었다.당시 그와함께 결과를 지켜본 장경우(張慶宇)부총무의 기억. 金총무가 표결직후 청와대 최병렬정무수석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그는『아이구 와이래 됐는지 모르겠다.아 이 촌놈들이…,총무가 일일이 표찍는 방법을 가르쳐줘야하나…』고 먼저 답답한 처지를 하소연하는 식으로 선수를 쳤다.
金총무는 盧대통령의 경북고 동기동창 친구이자 청와대사령탑격인최병렬수석의 신문사 직계 선배.그런 인간관계에다 6공 창업공신이라는 위상까지 갖춘 그였기에 그런 너스레가 받아들여질수 있었던 것이다.
잠시 그의 입지를 살펴 보자.
총선 참패 직후 盧대통령이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이 金총무였을정도로 그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은 절대적이었다.아직 개표가 완료되지도 않은 총선 투표 다음날 이른 시각부터 청와대옆 궁정동안가에서는 당정고위간부들이 모여 차후 대처방안 을 협의하고 있었다.그시간 盧대통령은 경북 선산 지역구에 있던 金당선자(당시정무장관)에게 전화해『당장 청와대로 올라오라』고 불렀다.대통령은 다음날 일찍 나타난 金장관에게『여소야대라 국회운영이 어렵게됐다』며『정무장관은 그만두고 원내 총무를 맡아 국회를 잘 운영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그자리에서 그와 상의해 국회직과 당직개편안을 마련했다.당시 盧대통령은 김재순(金在淳)씨를 당대표로,윤길중(尹吉重)씨를 국회의장으로 생각하고 있었다.3공 인물인 金씨는 5공초 구정치인으로 정치활동을 규제당해 사실상 정계를 떠 났었는데 盧대통령이 특별히 중용하고자 강원도 철원에 공천해준 6공 사람.
반면 尹씨는 全전대통령이 발탁한 5공 원로.당연히 실질적 역할이 없는 국회의장에 尹씨,당을 지휘할 대표직에 金씨를 앉히고싶어한 것이다.하지만 오랜 공백끝에 정계에 복귀한 金씨는 개인적으로 뿌리가 없는 당대표보다 입법부 수장이라는 명예로운 국회의장직을 원하고 있었다.
金장관은『여소야대가 돼 당대표보다 국회의장 자리가 오히려 할일이 더 많다』며 盧대통령이 신임하는 金씨를 의장직에 천거했다.대신 尹씨는 당대표가 됐고,盧대통령은 5공 인물인 尹대표 대신 자신의 보안사령관 후임이었던 박준병(朴俊炳) 의원을 사무총장에 임명해 사실상 당의 운영을 맡게했다.그토록 신임이 두터웠지만 책임은 책임인지라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이 부결된 그날밤 金총무는 윤길중대표.박준병사무총장과 함께 사표를 들고 청와대로 갔다.盧대통령은 이미 인내력을 충분히 회복한 상태였다.
대통령은 도저히 있을수 없는 어처구니 없는 실책에 대해서도『여소야대가 됐을때 누구나 예상했던 일 아닙니까』라고 씁쓰레한 표정을 지은뒤『민심수습이 시급한 일이지 사표를 낸다고 해결되는문제가 아니니 가져가십시오』라며 이들을 오히려 위로했다.
그렇지만 불똥은 黨쪽으로 튀고 있었다.당일 표결에 불참한 민정당의원 색출작업이 시작됐다.두사람,이원조(李源祚).최운지(崔雲芝)의원이었다.행적 조사 결과 골프치느라 불참했던 것으로 확인됐다.당장 징계가 떨어질듯했다.그러나 李의원이야 말로 全.盧두 대통령의 가까운 친구이자 정권의 자금줄이 었고 징계론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다.
***사무처 요원만 징계 대신 사무처중 원내활동을 지원하던 의원실(지금의 원내기획실)만 혼쭐이 났다.마침 그날 표결에 앞선 회의에서 사무처 직원이 표결방법을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도둑이 들려면 개도 안짖는다」는 속담처럼 평소 기 표소안에 만들어 붙여놓던「可」표 모범답안 샘플도잊어버리고 안붙여 놓았던 것이다.
의원실장을 맡고있던 사무처요원이 징계를 받아 물러났다.대신 의원실기능을 강화한다는 명분에서 현역의원에게 의원실장직을 맡기기로해 재선의원으로 부총무인 장경우의원이 새로 임명됐다.
3공이나 5공에서 있을수 없는 일도 6공에서는 이렇게 아무런문책없이 대통령의 인내심으로 받아들여졌다.3,5공에서 볼수 없었던 盧대통령의 인내심은 「물」로 불리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여소야대의 위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여소야대는 6공의 정치구상과 일정을 모두 뒤집어 엎었다.특히 6공측이 일단락됐다고생각했던「5공 청산」문제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吳炳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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