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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한국판 CSI' 안방극장 달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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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1970~80년대를 관통한 이들에게 영원한 ‘반장’은 탤런트 최불암이다. 회색빛 바바리코트에 입에 문 담배, 찡그린 얼굴…. MBC ‘수사반장’ 의 ‘박 반장’(최불암)은 한국 아날로그 수사물의 상징이었다. 마지막회에서의 그의 대사 “빌딩이 높아지면 그림자도 길어진다”는 아직도 많은 이의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러나 요즘 세대들에게 ‘반장’을 물으면 어김없이 길 반장(CSI 라스베이거스 ‘길 그리섬’)이나 호 반장(CSI 마이매이 ‘호라시오 케인’)이란 답이 돌아온다. 그럴 법도 하다. TV를 켜면 해외 범죄·수사물 천하이기 때문이다. 영화채널 OCN이 올 추석 ‘CSI 시리즈’를 50시간 연속 방영했을 정도니, 한국의 ‘박 반장’이 설 땅은 좁아 보인다.

그런데 최근 한국형 범죄 수사물이 다시 일어설 조짐을 보이고 있다. 물론 ‘박 반장’의 복귀는 아니다. 과학과 심리로 무장하고, 사극·심리 다큐멘터리·리얼리티로 옷을 갈아입었다. CSI의 아성을 넘으려는 한국 범죄물들의 도전이 시작됐다.

◆케이블·위성 접수한 해외 수사반장들=미국 CBS에 20억 달러(약 2조원)의 수익을 가져다 줬다는 ‘CSI 과학수사대’를 필두로 방송 채널을 돌리면 여기저기에 해외 범죄물로 가득하다. 얼핏 추려도 20여 편. ‘미드(미국 드라마)’가 대세지만, ‘살인의 현장’(Q채널) 같은 남미 쪽 작품도 있다. 이들 작품에선 땀깨나 흘리고 주먹 휘두르는 형사가 많지 않다. 대신 머리를 쓴다. 채널 CGV의 ‘본즈’는 피살자의 뼈 하나만으로 단서를 찾는다. ‘넘버스’(XTM)는 천재 수학자가 수학적 방법으로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간다.

◆“한국판 CSI, 우리가 만든다”=“살인을 하지 않고선 난 살 수가 없었다….” 창백한 표정에 나지막한 독백. 방구석에 혼자 앉아 있던 조동구(가명·당시 38세)는 흉기를 들고 집을 나섰다. 마지막 전철을 타고 범행 장소로 가는 게 그의 버릇. 거리를 헤매던 그에게 먹잇감이 발견됐다. 20대 여성이다. 조동구는 흉기를 꺼내 그녀를 무참히 살해한다. 동기? 이유? 없다. 그냥 눈에 띄었을 뿐이다-.

Q채널·YTN스타·OBS경인TV가 공동 제작한 13부작 ‘살인자는 말한다’의 한 부분. 13일 방송을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한국에서 처음 시도되는 범죄인 심리 다큐다. 철저히 살인자의 시선에서 사건에 접근한다. 범죄심리학자와 담당 형사. 프로파일러(범죄분석요원)가 사건의 실체를 분석한다. 위 주인공 조동구는 2004년부터 2006년까지 13명을 살해해 서울 서남부 일대를 공포로 몰아넣은 인물. ‘살인자는 …’는 곱상한 외모 탓에 어렸을 적 동네 아저씨로부터 성폭행당한 경험, 이웃과의 단절, 범죄 영화에의 몰입 등이 살인의 욕구를 불러왔다고 설명한다. 이 작품은 2000년 부모를 토막살해한 사건으로 충격을 줬던 명문대생, 낮에는 평범한 회사원이 밤이면 살인마로 둔갑하는 다중인격 살인을 다룬 에피소드도 방송할 예정이다.

MBC 드라마넷은 사극과 수사물을 접목한 ‘별순검’으로 재미를 보고 있다. 외국에선 흉내내기 힘든 포맷이다. 케이블에선 시청률 1%만 나와도 대박이라는데, 지난달 13일 첫 방송 이후 3%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 중이다. 궁녀의 살해나 조선시대판 여고괴담 전설 등 소재도 신선해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별의별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다 있다고 하지만 tvN의 ‘나는 형사다’는 그 무대를 아예 경찰서 안으로 옮겼다. 강력 범죄 수사 현장을 6카메라로 접근해 거친 숨소리까지 담아낸다. 황의철 PD는 “범죄를 통해 한국사회의 어두운 면을 조명하고 싶었다”며 “수사 기법이 노출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리얼리티를 살리고 있다”고 말했다.

CSI의 영향 때문인지 한국형 범죄물에도 과학수사의 그림자가 묻어나는 게 특징이다. ‘별순검’의 수사 기법은 조선시대 수사기록서인 『중수무언록』『흠흠신서』를 참고한 것들이다. 피의 흔적을 식초 묻힌 천으로 알아보거나 양파를 피부에 붙이면 울혈이 나타나는 장면 등이다. ‘살인자는 말한다’ 역시 조서와 기록, 각종 인터뷰를 통해 객관성을 높이고 있다. 올 5월부터 방송된 KBS2TV ‘특명 공개수배’ 역시 “업그레이드된 과학수사의 면모를 부각한다”는 점을 제작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여성이 더 많이 보는 범죄·수사물=범죄물은 남성 전유물일 것 같지만 실상은 아니다. TNS미디어코리아 분석 결과 거의 모든 프로그램에서 여성의 시청률이 더 높았다. ‘특명 공개수배’의 경우 40대 여성의 시청률이 6.6%인 반면 40대 남성은 3.9%였다.

<그래픽 참조>

남녀노소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 외에 매니어층이 많다는 게 또하나의 특징. 자연히 참여도도 높다. ‘특명 공개수배’의 경우 52명의 용의자를 공개수배해 벌써 21명을 검거(자수 5명)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제헌 PD는 “전화는 물론 모바일·인터넷을 통해서도 활발한 제보가 들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는 범죄·수사물에 대한 관심이 가속화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CSI 이후 과학적 사고, 추리, 논리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어 범죄 수사물에 대한 수요는 더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며 “개인의 심리에 점차 관심을 가져 가는 사회 풍조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했다.


"범행 동기 분석은 교정·치료에 도움
'살인자…' 진행 맡은 표창원 교수

“연쇄 살인범들은 대개 자신의 범죄를 합리화합니다. 사회정의 같은 거창한 구호를 내세우곤 합니다. 그러나 그 안은 허구투성이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심리 연구’는 살인자의 거짓 뒤에 숨어 있는 진실까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13일 방송을 시작한 ‘살인자는 말한다’(Q채널 매주 화요일 밤 12시, YTN스타 화요일 밤 10시)의 진행을 맡은 표창원(경찰대 범죄심리학·사진)교수는 범죄심리학의 방향성을 이렇게 정의했다. 그는 범죄인의 심리를 분석하는 의미를 ‘교정’과 ‘치료’라는 키워드에서 찾았다. ‘살인자는…’도 그런 차원에서 기획되고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범인이 어떤 동기에서 범행을 저질렀고, 어떤 성격적 특징을 갖고 있는지 아는 일은 다른 범행을 예방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범인들은 괴물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들도 범죄의 늪에 빠질 수 있고, 사회는 범죄를 예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범죄자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범행을 합리화하는 경우는 없을까.

“그 점을 가장 고민했습니다. 객관성과 중립성이란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늘 노력합니다. 범죄자 이야기 외에 객관적 자료를 확보하는 것도 그 때문이죠.”

표 교수는 최근 범죄 수사물이 늘고 있는 것도 당연한 현상으로 설명했다.

“과거 먹고사는 문제가 절대적이었다면 이젠 ‘안전의 욕구’가 중요해진 겁니다. 수사기관에 대한 미디어의 접근이 자유로워진 것도 또 하나의 이유로 꼽을 수 있겠죠.”

이상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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