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비즈니스 메카로] 4. 한국을 살고 싶은 곳으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6면

기업하기 좋은 환경만으로 외국인투자가 그냥 들어오진 않는다. 생활하기 편리해야 외국 기업이 다른 데보다 먼저 한국을 찾게 마련이다. 그런데 교육.의료.주거.교통 여건 등 현실은 외국인들이 먹고, 자고, 움직이는 데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이 둘을 서울외국인학교에 입학시키는 데 다섯달이 걸렸다. 그나마 남들보다 빨리 한 게 그렇다. 우리 회사 주재원 11명 중 가족들을 다른 곳에 두고 혼자 와있는 경우가 둘이다. 한 사람은 아이들을 싱가포르 학교에, 다른 한명은 본국 기숙학교에 보낸다."(개빈 하퍼 셰브론 텍사코 지사장)

*** 한글 모르면 버스 못타

외국인들도 다른 나라에서 근무할 때 가장 먼저 따지는 게 자녀교육 여건이다. 필요한 인력을 한국에 발령낼 때 당사자들이 자꾸 빼는 이유 중 하나가 교육 문제다. 기본적으로 외국인학교 자체가 적은 데다 그 대부분이 영어 중심 학교라 선택의 폭도 좁다. 2002년 한국에 부임한 데이비드 테일러 뉴질랜드 대사는 외국인학교에 입학 신청을 한 뒤 다섯달이 지나서야 큰딸의 입학허가를 받았다.

"시설이 좋고 대학진학률도 높은 '1급' 외국인학교가 홍콩과 싱가포르보다 적다. 싱가포르 미국인학교는 학생수만 3천명이나 된다."(할란 라이소 서울외국인학교 총감)

"새로 생기는 국제학교에 한국인 학생이 너무 많다. 규제를 풀어 미국.유럽계 학교재단이 한국에서 직접 학교를 운영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앤 라두세 브리지 인터내셔널 컨설팅 대표)

"서울시가 보광동에 외국인학교를 짓기로 한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미군이 서울 용산기지에 운영하고 있는 학교와 병원 시설이 기지 이전 뒤에도 유지되기 바란다."(레스 에드워드 주한호주뉴질랜드상의 회장)

몸이 아픈데 치료가 어렵고 절차가 복잡하면 그곳에 살고 싶은 마음이 뚝 떨어진다. 의료진과 외국인 환자 간 의사소통이 잘 안되고 의료 관행과 문화도 낯설다. 특히 갑자기 아플 때 황당하다고 말한다. 119구급대와 앰뷸런스를 부르고 싶어도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이 한밤중에 가까스로 응급실로 실려갔다. 두 시간 뒤 의사를 보았는데 영어를 제대로 못했다. 결국 이튿날 아침에야 영어가 가능한 의사가 와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레스 에드워드 회장)

"한국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제대로 설명을 안 해준다. 더구나 입원할 경우 간호를 환자 가족들에게 요구하기 때문에 힘들다."(앤 라두세 대표)

집 구하는 문제도 단골로 지적되는 애로사항이다. 월세가 늘어났지만 1년치 임대료를 한꺼번에 요구하는 경우가 상당수다. 여전히 집세가 비쌀 뿐더러 생소한 전세 관행 때문에 골탕먹는 경우도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 캐나다 텔어스사에서 나온 컨설턴트 60명의 전세금 몇백만달러를 회수하는 데 2년도 넘게 걸렸다."(조앤 배론 주한캐나다상의 회장)

*** 1년치 월세 미리 요구도

길을 물으면 고개를 외면하는 한국 사람이 줄었지만, 외국인에게 의사소통 문제는 큰 숙제다. 버스는 한국어를 모르면 어디로 가는지 몰라 타기 불안하다. 그토록 '금융 허브'를 외치는데도 시중은행의 신용카드 사용과 금융거래 명세서에 영어는 한 자도 없다.

"회화나 도예 전람회에 관심이 많은데 영어 설명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작품 내용을 잘 모르겠다."(조앤 배론 회장)

"영어 TV 방송을 더 세워야 한다. 영어신문이 전하는 한국 기사의 범위도 너무 좁다. 외국인들도 한국 부동산 시장을 알고 싶다. 쇼핑을 어디서 하는 게 좋은지도 궁금하다."(더글러스 바버 소피텔 앰배서더 지배인)

"서울과 한국 전체를 영어로 표시한 지도를 빨리 만들어야 한다. 도로 표지판도 영어로 적고는 있지만 알아보기 어렵다."(크리스토퍼 도르 경기도청 투자자문관)

내국인에게는 어느새 '익숙한 환경'이 되었지만, 외국인에게는 한국 생활을 힘들게 만드는 것들은 이 밖에도 많다.

"처음 서울에 왔을 때 대기오염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랐다. 시내버스를 서둘러 천연가스 버스로 바꾸고, 자동차 회사가 환경오염이 적은 자동차를 개발하도록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 (토마스 피난스키 법무법인 김신&유 변호사)

"같은 곳을 가는데 어떤 때는 30분, 어떤 때는 한시간이 걸릴 정도로 교통체증이 심하다. 서울에선 주소만 갖고 어디를 찾아가기 어렵다."(더글러스 바버 지배인)

"컴퓨터를 샀는데 영어 프로그램이 적어 환불하는 데 애를 먹었다. 전화를 걸자 이리저리 돌렸고 심지어 끊기도 했다."(크리스토퍼 도르 자문관)

*** 서울의 상징 만들어라

"2002년 새 외국인 등록번호로 바꿨는데 인터넷 사이트 회원 등록이 잘 안 된다. 주민등록번호와 비슷한데 내.외국인 식별번호 때문에 회원 등록이 거부되는 것 같다."(퀄컴코리아 김승수 이사)

"출입국 규제가 까다롭다. 세계적으로 동거 커플이 늘어나는데 이들이 한국에 들어올 때 한국법은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앤 라두세 대표)

그래도 대도시에서의 외국인 생활환경은 많이 나아졌다는 비즈니스 메카 자문단(BMAG)의 종합진단이다.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것 못지않게 외국인들이 찾아가 즐길 수 있는 한국과 서울의 상징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 고유의 전통문화 행사도 외국인에게는 매력적인 볼거리다."

◇특별취재팀=김정수 경제연구소장, 양재찬.신혜경 전문기자, 이종태.김광기 경제연구소 기자, 이승녕.하현옥 정책기획부 기자, 홍주연 산업부 기자<jeri@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cogito@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