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말로 천냥 빚도 갚는다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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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인생의 목적이 어떻다고 거침없이 읊어대는 사람은 성인이 아니면 사기꾼이기 쉽다. 기업이 목적이 무엇이라고 쾌도난마로 풀어내는 사람에 대해서도 나는 비슷한 두려움을 느낀다. "기업의 목적은 이윤을 많이 내어 국가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대한상공회의소 박용성 회장이 중.고교 교사들한테 행한 강연 구절인데 그 말은 옳다. 그러나 "교과서에 기업의 목적은 이윤의 사회 환원이라고 기술한 것은 틀렸습니다"라고 외칠 때는 뉘앙스가 달라진다.

*** 이윤은 사회적 책임을 동반

먼저 교과서가 과연 그렇게 되어 있는가? 중3 사회 교과서 하나에는 "문화 활동이나 장학 사업 등에 대한 지원을 통해 기업 이윤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이런 기업 활동은 기업의 발전은 물론 국민의 복지 향상과 국가의 경제 성장에도 기여한다"고 씌어 있다. 다른 교과서에도 "기업은…좋은 제품을 보다 싸게 만들어 소비자를 만족시키고, 근로자에게는 일거리를 제공한다…이와 같이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회 공공의 이익에 공헌한다"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학교의 경제 교육이 이윤의 사회 환원을 강제라도 하는 듯이 펄쩍 뛸 일은 아니지 않은가. 초일류 도약을 위해서는 '넘버 원'이 되거나 '온리 원'이 되라는 어느 그룹은 오히려 '나눔 경영'을 실천하고 있다.

그리고 이윤만 많이 내면 그만인가? 위의 교과서는 단원마다 '생각열기'라는 머리글을 실었는데 이런 내용이 있다. "몇 해 전 가뭄으로 메말랐던 강에 비가 와서 물이 불어나자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 원인은 어느 공장에서 빗속에 몰래 버린 독극물 때문이었다. 기업가가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고 사회 공공이익을 생각하지 않으면 어떤 문제점이 발생할까." 어떤 기업주도-朴회장도-이윤 창출에는 사회적 책임이 따른다는 이 설명에 이의가 없을 터다.

朴회장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업은 좋은 제품 만들고, 돈 많이 벌어 세금 많이 내는 것으로 국가에 기여합니다." 그러니 딴소리하지(!) 말라는 말이렷다. 학생은 좋은 학교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해 좋은 성적 내는 것으로 국가에 기여하고, 시민은 좋은 직장에 들어가 돈 많이 벌어 세금 많이 내는 것으로 국가에 기여하는 것을 누가 마다하랴. 그러나 좋은 학교 입학과 좋은 직장 취직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학생도 좋은 학교 못 갔다고 정부를 탓하지 않고, 어떤 시민도 좋은 직장 못 얻었다고 정부에 팔매질하지 않는다. 기업도 예외일 수 없다. 돈 벌어 세금 내면 그만이라면서도 소비와 투자 활성화에 근본 대책을 내놓지 않으면 큰일난다고 정부에 대드는(?) 것은 사리에 어긋난다. 정부는 돈벌이 멍석만 펴고, 기업은 돈만 버는 것이 기업이 국가에 기여하는 길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업이 실업자 구제 기관입니까? 손해 보는 것 알면서 필요없는 사람을 뽑는 기업이 있다면 위선자입니다." 朴회장의 레토릭은 정말 근사하다. 그러나 기업이 살아야 근로자가 산다는 말이 진정으로 빛나려면, 근로자가 죽으면 기업은 어떻게 되느냐는 물음에 답해야 한다. 기계는 기름칠만 하고 3년을 묵혀도 괜찮지만, 사람은 사흘만 입에 풀칠하지 않으면 다시 쓰지 못한다. 그래서 기업은 실업 구제 기관이 아니지만 실업자 구제에 나서는 것이다. 건설업계가 불황 대책으로 일자리 만들기에 앞장선 것이 '손해 보는' 짓이고, 삼성그룹이 청년 실직을 배려해 지난해 신규채용 목표 5천6백명에 1천1백명을 더 뽑은 것이 '위선'이란 말인가.

*** 기업 일자리 만들기 너무 당연

"근로자는 기업의 생존과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이해 관계자의 하나이기 때문에 기업 활동의 동반자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처럼 고교 경제 교과서는 잘 가르치고 있다. 기업의 실업 구제를 야유하는 어른들이 잘못 배운 것이다. 朴회장이 전하는 고언의 진의를 모르는 바 아니나, 청년실업이 나라 경제의 수렁이 되고 비정규 취업이 고용의 절반을 넘는 이 혹독한 시기에 베고 자르는 말보다 베풀고 나누는 마음이 앞섰으면 한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도 갚는다니.

정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