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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 콘텐트’ 도박 성공하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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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 06면

1995년. 케이블TV 시대의 개막과 함께 엔터테인먼트 전문채널로 출범한 현대방송(HBS)은 과감한 투자로 TV 콘텐트 시장에 새로운 바람을 시도했다. ‘종합병원’을 만든 최윤석 PD가 연출하고 당시 최고의 청춘스타였던 김호진과 김지수가 출연한 한국 최초의 케이블 TV 드라마 ‘작은 영웅들’을 필두로 지상파 재방송 없이 1주일 내내 새로운 자체 제작 프로그램으로 편성표가 채워졌다.

2007 케이블 TV의 변신

당시 재계 선두를 다퉜던 현대그룹의 이름값을 대변하듯 지상파 방송사로부터 연출 인력들이 대거 스카우트됐고, 사당동 제작센터(현 CJ홈쇼핑)의 3개 스튜디오에는 불이 꺼질 날이 없었다. 제작비도 지상파 방송사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국내 최초의 일일 연예정보 프로그램이던 ‘HBS 연예특급’은 제작인원만도 20여 명에 달했다.

도전의 결과는 참혹했다. 4년 만인 1999년 현대방송은 넥스티미디어에 매각됐고 다시 CJ그룹에 팔려 영화 채널로 모습을 바꿨다. 자체 제작을 위해 기용됐던 수많은 인력은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그 뒤로 케이블TV 업계에서 ‘자체 콘텐트 확보’란 ‘자살행위’와 비슷한 말로 여겨졌다.

2006년 9월. tvN의 개국은 오랜 꿈의 부활로 여겨질 만했다. 강석희 당시 tvN 대표는 “주간 10편 이상의 오락물과 연간 7∼8편의 드라마를 자체 제작해 방송하겠다”고 취임 일성을 토했다. 과거 주철환 PD(현 OBS 사장)와 함께 MBC-TV 예능 무적시대를 이끌었던 스타 PD 송창의가 공동대표를 맡는다는 것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게다가 이런 움직임은 곧바로 기존 케이블TV 업계를 자극했다. 독보적인 영화전문채널 OCN은 즉시 자체 드라마 제작을 강화했고 최근에는 MBC가 새로운 채널 ‘MBC 에브리원’을 론칭하면서 케이블TV형 오락 프로그램 시장에 뛰어들었다.

‘좀 더 독하게’ 인디영화식 전략
과연 케이블 TV의 두 번째 도전은 성공을 말할 수 있을까? 몇몇 프로그램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tvN의 ‘독고영재의 현장르포 스캔들’은 지상파에서도 의미 있는 숫자인 시청률 4.8%(물론 48%는 아니다)를 기록하기도 했고, ‘막돼먹은 영애씨’는 호평 속에 시즌2 제작에 들어갔다. 코미디TV의 리얼리티 프로그램 ‘나는 펫’, YTN스타의 ‘서세원의 생쇼’ 등이 존재감을 주고 있고, OCN 드라마 ‘키드 갱’ 등이 만만찮은 인기를 누렸다.

현재 가장 두드러진 인기 프로그램에는 공통점이 보인다. 첫째는 지상파에서 히트한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참고하자, 그리고 둘째는 그보다는 ‘독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 ‘독고영재의 현장르포 스캔들’과 코미디TV ‘데미지’ 등의 모체는 KBS-2TV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두 프로그램 모두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새로운 장르를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결국 ‘출연자들이 얼굴을 가리고 나오는 드라마’라는 뜻의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부부클리닉’과 ‘스캔들’을 소비하는 계층도 똑같다.

코미디TV의 스테디셀러인 ‘시키면 한다! 약간 더 위험한 방송’과 KBS-2TV ‘스펀지’, MBC에브리원의 ‘무한걸스’와 MBC-TV의 ‘무한도전’을 살펴봐도 이 공식은 그대로 적용된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하되, 좀 더 낯뜨겁고 노골적인 부분까지 보여주자는 뜻이다. ‘여성판 무한도전’이라는 수식어로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무한걸스’가 방송 첫회를 여성 출연자들의 가슴 사이즈를 재는 것으로 시작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무슨 뜻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제작 방식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특히 ‘스펀지’와 ‘시키면 한다…’의 비교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사이에서 살아남는 인디 영화를 연상시킨다. 미처 몰랐던 사소한 현상을 전문가들의 해석을 통해 지식으로 승화시키는 우아한 ‘스펀지’에 비해 ‘시키면 한다…’에서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는 식전에 주는 빵을 정말 무제한으로 줄까’ 혹은 ‘콜라에 달걀을 삶으면 무슨 맛일까’처럼 다소 장난기 섞인 생활 속의 질문에 제작진이 직접 몸으로 도전한 뒤 답을 전해준다.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제작비 절감’이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실험적 시도 불구 독창성은 밋밋
반면 지상파 방송에 비해 크게 독창적인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일단 ‘막돼먹은 영애씨’ 정도를 꼽을 수 있다. KBS-1TV ‘인간극장’ 등에서 눈에 익은 다큐멘터리풍의 내레이션으로 독특한 느낌을 주면서 여자로서의 매력은 별로 없는 노처녀 주인공 영애(김현숙)의 분투기를 웃음으로 풀어내 큰 호응을 끌어냈다. 비슷한 소재로 히트한 지상파 드라마 MBC-TV ‘내 이름은 김삼순’을 단박에 판타지의 영역으로 쫓아낼 수 있었을 정도다.

tvN의 또 다른 문제작 ‘tvNgels’도 비록 선정성 시비가 끊이지 않았지만 지상파와의 차별화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비키니 차림의 미녀들이 팀 또는 개인 단위로 자신의 성적 매력을 극대화해 대결을 펼치는 일종의 서바이벌 게임인 이 프로그램은 최근 국정감사에서까지 도마에 오르긴 했지만, 과연 ‘사회악’으로까지 불려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방송시간대와 시청자층을 고려하지 않고 모든 프로그램을 같은 잣대로 평가하는 것이 온당치 않다는 지적 때문이다. ‘tvNgels’ 출연진으로 구성된 여성 댄스 그룹 결성을 추진하고 있는 뮤지션 신해철은 “이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국민의 뜻을 말해주는 것”이라며 옹호에 나서기도 했다.

지상파 TV에서 여러 차례 시도됐지만 토착화에 실패했던 서바이벌 방식의 리얼리티 프로그램 분야에서는 수많은 시도가 이뤄졌다. XTM의 짝짓기 프로그램 ‘S2’를 비롯해 Mnet의 ‘아찔한 소개팅’, tvN의 ‘러브룰렛 연상연하’ 등이 그렇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코미디TV의 ‘나는 펫’, 코미디TV의 ‘하드코어 서바이벌 러시’ 등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 짝짓기 프로그램들이다.

지상파 방송에서도 고전인 MBC-TV ‘사랑의 스튜디오’에서 KBS-2TV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에 이르는 짝짓기 프로그램의 역사가 있지만 케이블TV로 오면서 구애 방식은 훨씬 적극적이고 자극적인 형태로 변해갔다.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뿐이지 이들 프로그램의 선정성은 ‘tvNgels’를 훨씬 뛰어넘었다.

이런 측면은 케이블TV 쪽의 입장에서는 선정성 시비가 반드시 부담스러운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지간한 지역에서는 70개를 넘어가는 다채널 환경 속에서 오히려 누구에게도 관심을 끌지 못하고 조용히 묻히는 것이 최악의 상황이었다는 의미다.

각 방송사나 프로그램 제작사는 모두 표면적으로는 노출과 선정성에 대한 시비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중 일부는 노이즈 마케팅의 성공에 표정관리를 해야 했던 경우도 분명히 있다. ‘무플보다는 악플이 낫다’는 인터넷에서의 진리가 여기서도 힘을 발휘하는 대목이다.

상파와 같은 잣대에 볼멘소리
1995년에 비해 여건이 훨씬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현대방송이 매각되던 1999년의 케이블TV 가입가구 수는 140만. 지난해 통계는 그 열 배인 1400만 가구다. 여기에 DMB와 인터넷 방송 등 콘텐트의 판로도 넓어졌다. 광고 매체로서의 인지도는 높아진 반면 각 방송사의 제작비 절감 노하우도 크게 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넘어야 할 벽은 많다. 케이블TV 제작진의 가장 큰 불만은 지상파와 케이블TV에 똑같은 잣대를 들이미는 다소 권위주의적인 시각이다. ‘전 국민을 위한 방송’인 지상파와 소수 마니아를 겨냥해야 하는 케이블TV에는 다른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케이블TV의 이상은 하나의 히트 프로그램이 채널 전체를 견인할 수 있다는 미국식의 성공사례다. ‘섹스 앤 더 시티’ 이후 HBO는 ‘로마’ 등 대형 시리즈를 통해 ‘강력한 드라마 채널’의 이미지를 굳혔다. E!채널이 연예정보 프로그램으로, 케이블은 아니지만 신생 채널인 CW가 ‘도전! 슈퍼모델(America’s Next Top Model)’로 확고한 채널 이미지를 심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또 케이블TV는 다양하고 새로운 포맷을 실험하는 마당 역할을 하고, 여기서 인기를 얻은 오락 프로그램의 포맷이 그대로 지상파로 진출해 메이저 프로그램이 되는 상황도 꿈꿔볼 수 있다. 물론 한국 현실과는 좀 거리가 있다.

케이블TV 업계는 한국 지상파 방송들이 ‘돈 되는 일이면 뭐든 하는’ 한국 재벌기업들의 행태를 그대로 따라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너무 다양한 분야를 독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작비나 인력에서 절대 우위에 있는 지상파 방송들이 케이블TV의 아이디어를 수시로 도용한다는 피해의식도 있다.

지난 2005년 KBS-2TV ‘해피선데이’가 케이블TV 게임채널 온게임넷의 타이틀 영상을 표절한 사건이 단적인 예다. 물론 최근 65:35까지 높아진 ‘지상파:케이블TV’의 시청 비율에 바짝 긴장하고 있는 지상파TV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양보나 협조를 얻어낼 것이라는 기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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