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8. 서울 도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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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1944년 여덟 살 때의 필자. 부모님이 갑자기 사진을 찍자고 해 시큰둥한 표정이다.

나는 서울 사대문 밖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서울 가회동의 한 한옥에서 태어났고, 삼청동·계동을 거쳐 지금은 북아현동에 살고 있다. 만일 내가 계속 서울에서만 살았다면 지금과 같은 음악은 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씩 하곤 한다.

나의 어머니는 3대 독자인 내가 버릇없이 자랄까봐 상당히 엄하게 길렀다. 방학 때 나를 전북 옥구군 임피면에 있는 외가집으로 쫓아 보냈다. 거기에서 나는 시골의 정서를 이해하고 자연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됐다. 시골 친구들과 함께 참외·수박 서리도 해 먹고 모기에게 뜯겨보기도 했다. 까치 집에 들어가 있는 새끼 올빼미를 잡아서 기르며 올빼미가 어떻게 자라는지 한동안 관찰했던 기억도 있다.

서울에서만 살았더라면 몰랐을 시골 냄새는 아직도 내 기억속에 생생하다. 식사 시간이 되면 지푸라기가 아궁이에서 타고 있었고 아침에 일어나면 공기가 참 맑았다. 흙을 밟고 풀을 뜯었던 그 정서가 나의 음악적 상상력의 뿌리가 됐다는 생각이다.

나의 외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 작은 동네에 있었는데 뒷산에 올라가면 커다란 굴이 있었다. 거기에 옛날 장수들이 살았다고 했다. 선사시대에 힘 센 장수들이 살았다는 옛날 이야기는 너무 신기해 한동안 그 이야기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70평생 동안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이야기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 외가에서 들은 것들이다. 이런 경험과 기억들이 후에 나의 음악에 영향을 줬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시골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일인극 펼치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자주 공연을 펼쳤다.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희극적 모노 드라마였다. 내용은 동네 사람들과 우리 집안 식구들을 흉내내는 것이었다. 내가 우리 외할머니부터 시작해 사촌 형제들과 마을 어른들의 말투와 몸짓을 흉내내면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배꼽을 잡고 웃었다.

우리 본가도 외가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전북 옥구군 나포면으로 외가와 약 10리 가량 떨어져있었다. 어렸을 때는 외가에서 친가까지 자주 걸어다녔다. 시골 아이들은 씩씩하게 잘도 걸었지만 서울에서만 자란 나에게는 상당히 먼 거리였다. 특히 더운 여름날에 힘이들어 나중에 고생을 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누나와 16년 차이로 내가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가 친척들이 진짜인지 확인하러 우리 집에 몰려 왔다는 일화도 있다. 그만큼 귀한 자식이었지만 혹시 서울에서 버릇없이 클까 걱정돼 시골에 자꾸 보냈던 부모님의 배려는 적절하고도 옳았다는 생각이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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