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6. 조용했던 아버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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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잡지 ‘샘이 깊은 물’의 이민주 기자가 1989년 그려준 필자의 아버지 황태문씨.

“아버지 들어오신다!” 라는 소리가 들리면 집 안이 잠시 분주해졌다. 라디오조차 꺼야 했다. 모든 소리를 없애고 집 안을 아주 조용하게 만든 다음 아버지를 기다려야 한다. 나의 아버지 황태문(1903~72)은 조용한 걸 좋아하시던 분이다.

아버지는 외출하고 돌아오면 씻고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신문이나 한문으로 된 중국 고전소설을 즐겨봤다. 한글 소설은 “잔소리가 많아 못 읽겠다”고 하시던 분이다. 한 글자가 한 문장이 되기도 하는 한문이 아버지의 성격에 맞는 것 같았다. 나중에 내가 소설 쓰는 아내를 얻었는데도 며느리 소설조차 읽지 않았다. 음악을 듣는 것도 본 적이 없다. 또 “영화 구경을 평생 세 번 가봤는데 모두 시시해 중간에 나왔다”는 말씀도 했다.

이런 분이 집 안에서 큰 잔치가 벌어지면 덩실덩실 춤을 췄다. 평상시에는 단 한 가락도 소리를 내지 않는 분이 기분이 좋아지면 춤을 추는 것이다. 누나와 내가 결혼할 때 아버지의 춤을 본 사람들은 탄복했다. 명무(名舞)였다는 것이다.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아버지가 원래 흥을 즐길 줄 아는 분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판소리 명창 김소희씨와 박규희씨를 아버지가 오랫동안 후원했다고 한다. 김소희씨는 나보다 아버지를 더 먼저 알아 가깝게 지냈다고 말했다. 나는 그때부터 아버지를 다시 보게 됐고 그 뒤에도 아버지가 후원한 인간문화재급 명창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아버지는 타고난 사업가였다. 아버지는 청소년 시절에 나이를 속여 사업을 시작한 사람이다. 미성년자는 사업을 못하도록 한 법을 피해가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성년 행세를 하며 아버지는 군산에서 정미소를 열어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에 잘 되다가 파산했다. 어머니와 누나를 전북 삼례에 놔두고 혼자 서울로 올라와 돈을 벌었다. 평택에서 개간사업도 했다. 아버지는 돈 벌이보다 사업 자체를 즐긴 분 같았다. 사업가 기질을 버릴 수 없어 서울에서도 장사를 했고 그때 번 돈으로 가회동에 있는 한옥을 샀다. 내가 태어난 집이다. 이 한옥은 불과 몇 년 전에도 그대로 보존돼 있었는데 최근에 가봤더니 헐려서 다세대 주택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버지가 늘 사업을 벌였기 때문에 우리 집은 풍요와 빈곤을 오갔다. 번듯한 집에서 살았는가 하면 집에 있는 숟가락 한 개까지 모두 사라진 적도 있었다. 특히 만주에 벌여놨던 사업은 1945년 광복이 되면서 날아가 막대한 손실을 봤다.

내가 법대에 다니면서 가야금을 배울 때 아버지는 적극적으로 반대는 하지 않았지만 적잖이 언짢아 했다. ‘네 인생은 네가 사는 것’이라는 신념 때문에 꾸짖지 않았지만 내 가야금 연주를 들은 적은 없다. 녹음된 것도 듣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국악인 아들을 딱 한 번 인정하고 칭찬했다. 65년 처음으로 미국에 초청받아 호놀룰루·로스앤젤레스·샌프란시스코·시애틀에서 순회 연주를 한 뒤 아버지로부터 ‘나는 너를 장하다고 생각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말 수가 적으신 전형적인 조선의 아버지셨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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