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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억 대박 잊고 300억 들고 떠나는 사나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996년 5월 코스피 선물시장이 문을 열었다. 금융 선물시장으로는 세계에서 22번째였다. 그런데 이 시장은 기존의 주식시장과는 크게 다른 점이 있었다. 주식 시장은 거래의 대가로 주식을 주고받는 곳이었다. 물론 실제로는 금융결제원에 예치해두고 명의만 바뀐다. 그런데 종합주가지수 자체를 사고파는 지수선물시장에서는 현물로 건네고 받을 것이 없었다. 그저 거래 차익을 현금으로 정산할 따름이었다. 미국에서 세계 최초로 지수선물시장이 개설된 것이 1982년의 일이다. 국내에 개장한 지수선물시장은 증권업계나 투자자들 모두에게 낯설기 그지 없었다.

개장 초기 이 시장은 성장이 더뎠다. 그런데 한 명의 대박 투자자에 대한 풍문이 떠돌았다. 그는 지수의 움직임을 귀신같이 맞췄고, 그 결과 막대한 돈을 벌었다는 소문이다. 이 소문은 지수선물시장의 열기를 부채질했다. 그처럼 성공하려는 투자자들이 몰려들었다. 여기에 주식시장에서 손해를 본 투자자들도 '한 큐'의 환상을 안고 뛰어들었다. 개장 초기 3000~4000여개 계약에 불과했던 하루 거래량은 몇 년만에 100배 가까이 불어났다.

200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그 정체 불명의 선물 투자자에 대한 소문은 증폭돼 가기만 했다. 위험을 요리조리 피해간다고 해서 ‘압구정 미꾸라지’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당시 선물시장을 취재했던 전직 일간지 기자는 “압구정 미꾸라지가 한창 이름을 날릴 때는 그의 실존 여부가 업계에서 논란이 될 정도였다”고 말했다.

압구정 미꾸라지의 성공 비결은 재운?

2004년 선물시장의 큰 손이 드디어 베일을 벗었다. 당사자가 처음으로 자신의 실명을 공개하고 나선 것이다. 한국외국어대 인도어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은행 증권부에서 파생금융 상품을 담당한 경력을 가진 윤강로씨(당시 47세)였다. 그는 1998년 외환위기로 자신의 소속팀이 해체되자 회사를 뛰쳐나와 선물투자 전문가로 활동 중이었다. 이때부터 윤씨는 적극적인 대외 활동을 시작했다. 중국 베이징대에서 ‘선물 투기거래 실무’를 강의하는가 하면, KR선물(옛 한국선물)을 인수해 제도 금융권으로 진출하기도 했다. 선물 투자가 인기를 끌면서 이듬해 5월 그의 첫 공개 강연에는 청중들이 장사진을 이루기도 했다.

공개 강연에서 천기와 같았던 자신의 성공비법을 누설했다. “나이 40까지는 은행에서 주식만 거래했는데 돈을 못 벌었다. 용하다는 어느 스님이 어머니한테 '둘째 강로는 재복이 장난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둘째는 은행에 다니고 돈벌이는 시원찮다고 대꾸했다. 그러자 그 스님은 ‘재운이 트이는 것은 40부터다’라고 했다. 신기하게도 내 나이 마흔부터 선물거래를 하고 돈을 좀 벌었다.”

너스레와 달리, 그는 돈을 조금 번 것이 아니었다. 8000만원으로 시작한 종자돈을 무려 1600배나 불렸다. 당시 1300억~1400억원에 이르는 투자 자금을 보유한 그의 선물 거래액은 전체 선물 거래의 1%에 달할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성공을 늘 운으로 돌리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필승의 투자 비법을 갈구하는 공개 강연에서 그는 이런 얘기로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재운이 좋아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여러분도 점을 쳐 보고, 재운이 그렇게 좋지 않으면 지나치게 나서지 마라.”

정석 투자와 엄격한 자기 관리가 밑천

재운 못지 않게 높은 수익률을 유지하게 한 것은 사실 정석 투자와 엄격한 자기 관리였다. 그는 지나치게 잦은 단타 매매는 피하는 대신 수급 분석을 토대로 시장의 방향성을 점치는 데 치중했다. 어느 정도 손실이 발생하면 팔아치우는 손절매 원칙도 고수했다. 동시에 수익의 일부를 현금화하는 등 위험 관리에도 신경을 썼다. 전문 투자가로서 삶은 수도승과 다를 바 없었다. 언제나 밤 10시 반에 잠자리에 들고, 새벽 4시 반에 깨는 생활을 반복했다. 술은 원래 못했고, 좋아하던 담배마저 끊어버렸다. 기호품이라고 해봐야 비타민 C를 즐겨 먹는 정도였다.

흥미로운 것은 ‘커밍아웃’을 한 2004년 이후 윤씨의 그 지독한 '재운'이 다한 것처럼 보였다는 사실이다. 같은 해 5월 중국 정부가 예기치 않게 금리를 올리는 등 긴축 정책으로 돌아섰다. 이로 인해 우리 증시를 비롯해 전세계 금융시장이 출렁거렸다. 이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윤씨는 당시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3년 연이어 모두 600여억원의 손실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 그는 지수 선물 외에는 투자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원칙을 스스로 깨기도 했다. 훨씬 더 위험 부담이 큰 외환 선물거래나 미국 선물시장에도 손을 댔다. 그러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의 잔고는 결국 300억원 가량으로 줄어들었다. 재운을 신봉했던 그답게 지난해 말부터는 개인적인 선물 투자를 사실상 중단했고, 올해 상반기 KR선물 지분도 상당 부분 처분했다. 선물시장 은퇴를 공론화한 지난 9월 이후에는 관리형 유학 등 새 사업구상에 몰두하고 있다.

‘압구정 미꾸라지’의 성공 신화와 함께 우리 주가지수 선물시장도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2005년 거래액 기준 세계 5위로 발돋움했다. 주가지수 옵션시장은 세계 2위 수준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거래량은 증가하는 반면 투자자 수는 정체 또는 퇴보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일확천금을 노리거나 주식시장에서의 손해를 만회해보려는 개인들이 줄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면서도 수익률이 높은 주식시장이나 펀드로 말을 갈아타고 있다. 말하자면 시장의 대형화ㆍ합리화 추세다.

지난해 윤씨는 KR선물 회장으로 있을 때 회사 홈페이지에 올린 ‘선물시장 10년의 소회’라는 글에서 우회적으로나마 이런 시장의 변화를 인정하고 수용할 뜻을 비쳤다. “(앞으로는 빼어난 개인이 두각을 나타내기보다는) 파생상품을 잘 다루는 금융기관이 각광을 받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300억원만 있으면 의미 있는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이란 그의 평소 입버릇처럼, 아니면 ‘압구정 미꾸라지’라는 그의 별명에 걸맞게, 그는 때맞춰 선물시장을 유유히 빠져나가고 있다. '두둑한' 잔고를 챙긴채. 이제 선물시장은 말 그대로 미꾸라지를 넘어 대어(大魚)의 시대 개막을 예고하고 있다.

이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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