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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대학 개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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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독일 연방정부 당국은 2005년부터 이른바 ‘엑설런스 이니셔티브(Excellence Initiative)’라는 이름 아래 대학 구조개혁 작업을 주도하고 있다. 이 작업의 핵심은 2011년까지 총 19억 유로(약 2조5000억원)에 달하는 정부의 재정 지원을 통해 대학의 연구 수준을 향상시키고, 특히 독일을 대표하는 세계적 수준의 엘리트 대학을 육성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독일 정부 당국은 70여 개 대학에서 개혁 프로그램을 제출받아 심사를 진행해 왔고 10월 최종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발표에서 대학과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엘리트 대학 육성 프로그램의 지원 대상이었는데, 이에는 베를린자유대학과 아헨공대, 그리고 괴팅겐·하이델베르크·프라이부르크·콘스탄츠대학 등 6개 대학이 포함됐다. 이로써 이미 지난해 1차 발표 시 선정된 뮌헨대학과 뮌헨공대, 카를스루에대학을 포함해 총 9개 대학이 구조 개혁을 통해 엘리트 대학을 육성하고자 하는 정부의 집중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다. 이들 대학은 앞으로 특히 대학의 연구기능을 강화하는 데 주력하며,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엑설런스 클러스터(Excellence Cluster)’를 추진한다. 이는 문(文)·이(理)·공(工) 가리지 않고 학문 분야 상호 간 경계를 뛰어넘는 학제적 연구, 아울러 대학과 대학 외부의 연구소, 특히 대학과 기업을 연결하는 산학연(産學硏) 복합 연구를 총괄적으로 일컫는다.

엘리트 대학의 육성을 목표로 현재 독일 정부가 추진하는 대학 개혁은 독일에서는 그야말로 교육 정책의 획기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그동안 독일에는 대학 간 우열이나 소위 ‘일류 대학’의 개념이 없었다. 대학까지 포함해 교육은 국가가 전담하는 공적 영역으로 여겨져 왔고 경쟁이나 시장 논리는 가급적 배제되었다. 그러나 ‘엑설런스 이니셔티브’는 대학 간 경쟁을 유도하고 우열에 따라 재정 지원을 차별화함으로써 대학의 평준화를 타파하려고 한다. 대학을 국가의 지원이 고르게 배분돼야 할 공공의 영역으로 생각하는 전통적 관념과 결별하고자 하는 것이다.

평준화 대신 경쟁을 도입하고자 하는 독일 정부의 의지는 확고하다. 그것은 엘리트 대학 육성 대상으로 선정된 대학의 지역적 분포에서 엿볼 수 있다. 9개 대학 가운데 절반 가까운 4개 대학이 남부의 바덴뷔르템베르크주에 집중돼 있으며, 옛 동독 지역에선 단 한 개의 대학도 선정되지 못한 사실은 대학의 경쟁력이 선정 기준이었을 뿐 지역적 안배가 고려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이처럼 독일 정부가 선택과 집중을 통해 엘리트 대학을 키우고자 하는 데는 평준화된 대학 체제로서는 국제 경쟁에서 낙오한다는 위기 의식이 작용하고 있다. 19세기 초 이른바 ‘연구 대학’의 개념을 처음 도입한 것은 독일이다. 하지만 오늘날 독일 대학은 대학과 대학 외부의 연구소가 이원화된 체제 아래 탐구 정신과 창의적 연구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학의 현실에 대해서는 특히 언론이 비판적이다. 독일의 언론은 올해 두 명의 독일인 학자가 물리학과 화학 분야에서 각각 노벨상을 받게 된 소식을 전하면서도 대학에 대한 우려를 빠뜨리지 않았다. 이들 노벨상 수상자가 모두 대학이 아니라 대학 외부의 연구소에서 배출된 사실은 ‘걱정거리’로 전락한 독일 대학의 연구 수준을 가늠케 한다는 것이다.

독일 정부가 추진하는 대학 개혁은 우리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학의 위기를 거론하지만 사실 독일의 학문적 전통은 여전히 세계적 명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 나라가 대학의 국제 경쟁력을 걱정하며 아우성치고 있다면 남의 일처럼 여길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한국 사회 일각에는 독일과는 거꾸로 대학의 서열을 파괴하고 평준화하겠다는 생각이 강하다. 대학의 평준화를 부르짖는 이들에게는 그동안 교육의 공공성을 강조해 왔던 독일의 교육 정책이 하나의 이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독일이 이제 변화를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들의 현실 인식은 그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탁월한 엘리트 교육 없이는 미래도 없다는 믿음이 ‘엑설런스 이니셔티브’의 핵심인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교육을 평등이라는 정치적·이념적 가치를 실현하는 수단쯤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다면 독일의 변화를 한번 살펴보라고 권하고 싶다.

안병직 서울대 교수·서양사<베를린 자유대학 체류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