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두우시시각각

‘이회창 출마’의 셈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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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만약 정동영 후보가 30% 수준까지 치고 올라와서 보수진영이 한눈 팔 여유조차 없을 만큼 긴장하고 있는 때였다면 어땠을까. 여론조사에서 그의 지지율이 10% 수준으로 3위에 그쳤더라도 그가 출마할 엄두를 냈을까. 아마 어려웠을 것이다. 범여권은 지리멸렬하고 보수세력이 한껏 기세를 올리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작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기다린 상황은 다른 것이었다.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이 범여권의 검증 공세에 시달려 위험한 수준으로 떨어지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이명박 후보의 불상사나 기대하는 ‘스페어 후보론’이 아니라 정권 교체의 ‘대안(代案) 후보론’을 외치며 정면으로 치고 나올 수 있었을 것이기에 말이다.

 이명박 후보가 YS를 중시하고 자신을 소홀히 한 데 대한 섭섭함 때문에 그가 출마한다고? 이 후보와 한나라당의 대북 노선이 못마땅해서 나섰다고? 그런 건 다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분석은 다 헛다리를 짚은 것이다. 대통령직을 향한 강한 집념이 있고 가슴에 응어리진 한이 있기에 그 누구도, ‘제2의 이인제’라는 비난조차도 그의 출마를 막지 못했다. 그가 대선 막바지에 이명박 후보와 단일화하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회창 출마’는 후보들에게 엇갈린 득실을 가져다 주었다. 가장 큰 피해자는 누굴까. 언뜻 이명박 후보일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당선이 유력시되던 후보에게 위협 요소가 등장했으니 그렇게 보일 뿐이다. 오히려 다른 위기를 상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잘 관리한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박근혜 전 대표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고 지지층에 위기의식을 불어넣어 결집시킨다면 말이다. 이미 BBK 의혹 공세를 이회창 출마설로 희석시킨 효과를 거두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 위기를 잘못 관리한다면 상쇄가 아닌 상승효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정작 피해자는 문국현 후보와 민주당 이인제 후보다. 문 후보는 지지율 10% 돌파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날벼락을 맞은 격이 됐다. 이래서는 범여권 후보 단일화의 중심이 되기는커녕 대선 후 진보세력의 구심점이 되는 것도 쉽지 않게 됐다. 이인제 후보의 꿈은 충청도의 대표성을 움켜쥐어 ‘호남+충청’ 연대를 구축하는 범여권 대선 후보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이제 충청권에 기반을 둔 국민중심당 심대평 후보가 이회창씨를 ‘모시겠다’고 하니 충청권 대표성마저 빼앗길 위기를 맞았다.

주목을 끄는 것은 단연 박근혜 전 대표다. 곳곳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다. 이명박 후보가 위기를 느낄수록 박 전 대표의 운신의 폭은 오히려 커진다. 그렇다고 박 전 대표가 이회창씨를 지지하기는 어렵다. 그의 성격으로 볼 때 ‘경선 승복 선언’을 지킬 것이다. 다만 이회창씨 문제에 대해 언급할 최적의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또 다른 수혜자는 정동영 후보다. 여론조사에서 이회창씨 탓에 3위로 떨어졌기는 하지만, 별로 나쁘지 않다. 보수의 표가 분산된다면 재집권의 가능성이 생긴 것이고, 기존 지지층의 범여권 후보 단일화 압박이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상황은 그 중심에 자신이 설 가능성을 확연히 높이고 있다. 민노당 권영길 후보로서도 시선을 끌 수 있는 노선상의 맞상대가 생긴 게 나쁠 리 없다. 이회창씨는 “수구 꼴통이라 욕먹는 것도 두려워하지 말자”며 이미 우측으로 멀리 갔다.

 세상사는 이처럼 간단하지 않다. 정치는 생물과 같아서 예상 밖의 변수가 속출한다. ‘독식(獨食)의 욕심을 버려라’ ‘통합과 타협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국민의 지지는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 이회창 출마가 남긴 교훈이다. 유난히 정치력이 취약한 대선 후보들이 이 교훈을 얼마나 잘 소화해낼지 지켜보자.

김두우 논설위원